지난해 말 정부가 금융산업 발전을 위해 핀테크를 집중 육성하겠다고 했을 때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정보기술(IT)과 금융의 융합을 통해 금융 거래 관행을 확 바꿀 핀테크가 은행 등 금융업에 혁신과 경쟁을 불러올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혁신은 이미 시작됐다. 정부는 이르면 다음 달부터 은행, 증권사들에 대해 비대면(非對面) 본인 확인을 허용하기로 했다. 은행 고객들이 은행 창구에 가지 않고도 계좌를 열고 금융 거래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0여 년 만에 금융실명제 규제의 근간이 바뀌는 셈이다. 1993년 도입된 금융실명제에 따라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은행 영업점에 가서 창구 직원에게 신분증을 내밀어 본인이라는 사실을 확인받아야 금융 거래를 할 수 있었다.
신치영 경제부 차장
정부가 금융회사들에 비대면 본인 확인을 허용키로 한 것은 인터넷전문은행 때문이다. 금융위원회는 IT 회사 등 비금융회사가 인터넷전문은행을 설립할 수 있도록 대면 본인 확인 방식을 완화하는 방안을 연구해 왔다. 대면 확인 방식은 오프라인 지점 없이 온라인으로만 예금을 받고 대출을 하는 인터넷전문은행 설립을 막는 핵심적인 걸림돌 중 하나였다.
비대면 본인 확인이 허용되면 지금까지 불가능했던 거래가 많이 가능해진다. 중국 전자상거래 업체 알리바바가 2013년 6월 중국에서 판매에 나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위어바오(餘額寶)처럼 은행이나 증권사에 가지 않고 인터넷으로 펀드에 가입할 수 있게 된다. 또 거래하고 있는 은행뿐 아니라 모든 은행의 예금이나 적금 금리를 인터넷으로 비교해 보고 온라인으로 가입도 할 수 있게 된다. 온라인으로 모든 거래가 끝나는 인터넷전문증권, 인터넷전문보험 등도 등장할 것이다.
이런 혁신은 어쩌면 한국의 '고장 난 금융'을 고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 모른다.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지난달 "금융업이 뭔가 고장 났다. 과감한 구조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 전적으로 동감했다. 국내총생산에서 금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2003년 7%에서 지난해 5.4%로 떨어지고 금융업 일자리는 작년 한 해 5만 개나 줄었으니 왜 아니겠는가.
고장 난 한국 금융은 금융회사를 떡 주무르듯 다루던 무소불위의 금융당국과 보신주의에 젖은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들의 합작품이다. 인허가권을 틀어쥔 금융당국은 진입장벽을 쳐놓고 국내 은행들을 보호해주고 길들였다. 은행들은 적당히 금융당국의 눈치를 보며 정권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면 국내 시장을 나눠 먹을 수 있었다. 예대마진(예금금리와 대출금리의 차이로 얻는 이익)으로만 매년 수천억 원의 이익을 낼 수 있으니 치열하게 경쟁할 필요도 없었다.
경쟁이 없으니 혁신도 없었다. 하지만 핀테크로 무장한 국내외 플레이어들이 시장에 들어오면 얘기가 달라진다. 경쟁에서 버티고 시장을 지키려면 끊임없이 혁신해야 한다. 고장 난 금융은 자연스럽게 고쳐질 것이다.
은행으로서는 당국의 보호막이 없어지고 무한경쟁에 노출되는 일이 분명 달갑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진취적인 은행장이나 금융회사의 임원들은 지금이 위기에 처한 한국 금융업에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한 금융지주회사 회장은 "금융당국의 양 날개인 금융위원장과 금융감독원장이 동시에 금융회사의 자율을 중시한다는 것은 한국 금융업에는 큰 행운"이라고 표현했다. 다른 은행장은 "임종룡 금융위원장-진웅섭 금감원장 체제에서 못 하면 금융업의 혁신은 영영 안 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감독당국이 깔아준 판에서 맘껏 경쟁력을 높이는 일은 금융회사 CEO들의 몫이다.
신치영 경제부 차장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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