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지나도 잊지 못하는 일이 있다. 몇 십 년이 흘러도 어제 일 같고,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 같은 것이다. 베트남 전쟁도 필자에게는 그런 기억 가운데 하나다.
1992년 12월 22일,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했다. 이상옥 당시 외무부장관은 하노이에서 수교성명에 서명했다. 필자는 이 장관을 따라갔다. 가장 큰 관심은 과거사였다. 출입기자들은 많은 토론을 했다. 한국으로선 처음으로 해외에 군대를 보내 싸운 나라다. 수교하기 전 어떻게든 과거사를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옥 장관의 발언은 의외로 간단했다. “일시적으로 불행했던 시기가 있었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며,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전 88년 서울올림픽 때다. 전쟁 이후 정부인사가 처음으로 선수단장 자격으로 방한했다. 레 부 단장은 한국군과 싸운 경험도 있다고 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그런 과거사를 가진 한국을 방문한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옛날 이야기는 덮어둡시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누가 잘못했다는 것인지도 모를 표현으로 ‘유감’을 표시하고, 베트남은 ‘덮어두자’며 넘어간 것이다.
이렇게 ‘옛날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 것은 대학생 시절의 한 가지 기억 때문이다. 유신 말기 학생들은 군사훈련을 받았다. 대학 1학년 때는 훈련소에 들어가 1주일간 집중 훈련을 받았다. 필자가 훈련을 받던 어느 날 문무대 야외 훈련장에 대령, 중령들이 여러 명 찾아 왔다. 대학생들에게 정신교육을 하겠다는 것이다. 우리 소대 앞에 선 한 대령은 자신의 베트남 참전 경험을 들려줬다. 내용은 대충 이랬다.
베트남에 있던 그의 부대가 작전에 투입됐다. 이동에 앞서 정찰병을 보냈다. 그런데 베트콩의 습격을 받아 모두 죽었다. 산 아래에 마을에 숨어 있는 베트콩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마을을 찾아가 촌장에게 베트콩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모른다고 했다. 오늘 중 내놓지 않으면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았다. 포병 부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마을의 좌표를 불러줬다. 적군이 방어선을 치고 있어 전진할 수 없으니 포 사격으로 지원해달라고 했다. 마을은 불바다가 됐다.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대학교 1학년생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40년 가까이 지난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의 추측대로 그 마을에 베트콩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노인과 부녀자와 어린아이들도 있었을 것 아닌가. 정찰병이 피습당한 앙갚음을 애먼 민간인에게 한 셈이다. 가장 놀란 것은 그걸 무용담이라도 되는 양 어린 대학생들에게 늘어놓았다는 사실이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육군의 대령 계급장을 달고. 어린 대학생들이 ‘용감한 국군’이라고 존경하길 기대했을까. 군인이 무서우니 까불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걸까. 그 장교의 정신은 온전했는지 지금도 의심스럽다.
그 이전에도 베트남의 잔인한 전쟁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다. 그러나 ‘월남에서 돌아온 용감한 김병장’의 허풍쯤으로 들었다. 엘리트 장교가 대학생들에게 자랑이라고 떠들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충격은 아직까지 바윗돌처럼 가슴을 짓누른다. 그 이후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관한 보도가 많이 나왔다. 개인적인 증언이나 책도 나왔다. 그러나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조사나 발표는 없다. 미국과 달리 아직도 마무리를 못한 것이다.
98년 김대중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해 대통령으로서는 처음 과거사를 언급했다. 그러나 표현은 어정쩡했다. “냉전이라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양국이 불행을 겪었던 시기가 있었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누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말인지 아리송하다. 이에 베트남 트란 둑 루옹 주석은 “과거는 뒤로 미루자”고 했다. 이해한다거나 없었던 일로 하자고 말하지는 않았다. 사과는 진심과 정성을 담아야 의미가 있다. 일본을 상대한 우리가 가장 잘 알지 않은가.
이달 초 베트남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베트남인 두 명이 방한했다. 그들은 “민간인 학살의 잘못을 인정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노력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일부 참전군인들은 명예를 훼손한다고 분개했다. 파병된 대부분의 군인은 이런 전쟁범죄와 무관하다고 믿는다. 아무리 일부의 일탈이라고 가리고, 묻어야 하는가. 구타, 방산비리처럼 오히려 드러내고, 고쳐나가는 것이 군의 명예를 지키는 길이다. 과거에 대해 정직하지 않고는 베트남 사람들과도 마음으로 친구가 될 수 없다.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
1992년 12월 22일,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했다. 이상옥 당시 외무부장관은 하노이에서 수교성명에 서명했다. 필자는 이 장관을 따라갔다. 가장 큰 관심은 과거사였다. 출입기자들은 많은 토론을 했다. 한국으로선 처음으로 해외에 군대를 보내 싸운 나라다. 수교하기 전 어떻게든 과거사를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옥 장관의 발언은 의외로 간단했다. “일시적으로 불행했던 시기가 있었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며,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전 88년 서울올림픽 때다. 전쟁 이후 정부인사가 처음으로 선수단장 자격으로 방한했다. 레 부 단장은 한국군과 싸운 경험도 있다고 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그런 과거사를 가진 한국을 방문한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옛날 이야기는 덮어둡시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누가 잘못했다는 것인지도 모를 표현으로 ‘유감’을 표시하고, 베트남은 ‘덮어두자’며 넘어간 것이다.
이렇게 ‘옛날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 것은 대학생 시절의 한 가지 기억 때문이다. 유신 말기 학생들은 군사훈련을 받았다. 대학 1학년 때는 훈련소에 들어가 1주일간 집중 훈련을 받았다. 필자가 훈련을 받던 어느 날 문무대 야외 훈련장에 대령, 중령들이 여러 명 찾아 왔다. 대학생들에게 정신교육을 하겠다는 것이다. 우리 소대 앞에 선 한 대령은 자신의 베트남 참전 경험을 들려줬다. 내용은 대충 이랬다.
베트남에 있던 그의 부대가 작전에 투입됐다. 이동에 앞서 정찰병을 보냈다. 그런데 베트콩의 습격을 받아 모두 죽었다. 산 아래에 마을에 숨어 있는 베트콩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마을을 찾아가 촌장에게 베트콩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모른다고 했다. 오늘 중 내놓지 않으면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았다. 포병 부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마을의 좌표를 불러줬다. 적군이 방어선을 치고 있어 전진할 수 없으니 포 사격으로 지원해달라고 했다. 마을은 불바다가 됐다.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대학교 1학년생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40년 가까이 지난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의 추측대로 그 마을에 베트콩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노인과 부녀자와 어린아이들도 있었을 것 아닌가. 정찰병이 피습당한 앙갚음을 애먼 민간인에게 한 셈이다. 가장 놀란 것은 그걸 무용담이라도 되는 양 어린 대학생들에게 늘어놓았다는 사실이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육군의 대령 계급장을 달고. 어린 대학생들이 ‘용감한 국군’이라고 존경하길 기대했을까. 군인이 무서우니 까불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걸까. 그 장교의 정신은 온전했는지 지금도 의심스럽다.
그 이전에도 베트남의 잔인한 전쟁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다. 그러나 ‘월남에서 돌아온 용감한 김병장’의 허풍쯤으로 들었다. 엘리트 장교가 대학생들에게 자랑이라고 떠들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충격은 아직까지 바윗돌처럼 가슴을 짓누른다. 그 이후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관한 보도가 많이 나왔다. 개인적인 증언이나 책도 나왔다. 그러나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조사나 발표는 없다. 미국과 달리 아직도 마무리를 못한 것이다.
98년 김대중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해 대통령으로서는 처음 과거사를 언급했다. 그러나 표현은 어정쩡했다. “냉전이라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양국이 불행을 겪었던 시기가 있었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누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말인지 아리송하다. 이에 베트남 트란 둑 루옹 주석은 “과거는 뒤로 미루자”고 했다. 이해한다거나 없었던 일로 하자고 말하지는 않았다. 사과는 진심과 정성을 담아야 의미가 있다. 일본을 상대한 우리가 가장 잘 알지 않은가.
이달 초 베트남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베트남인 두 명이 방한했다. 그들은 “민간인 학살의 잘못을 인정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노력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일부 참전군인들은 명예를 훼손한다고 분개했다. 파병된 대부분의 군인은 이런 전쟁범죄와 무관하다고 믿는다. 아무리 일부의 일탈이라고 가리고, 묻어야 하는가. 구타, 방산비리처럼 오히려 드러내고, 고쳐나가는 것이 군의 명예를 지키는 길이다. 과거에 대해 정직하지 않고는 베트남 사람들과도 마음으로 친구가 될 수 없다.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