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일사일언] '까막눈'이 한자를 그릴 때

바람아님 2015. 5. 19. 07:10

(출처-조선일보 2015.05.19 박상미 번역가·갤러리 토마스 파크 대표)


	박상미 번역가·갤러리 토마스 파크 대표

나는 그동안 한자를 읽는 대신 보아왔다. 서예를 드로잉으로 보는 것이다. 
한자가 워낙 조형적 문자이기도 했지만, 한자를 거의 잊어 읽을 수 없다는 이유도 한몫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한문을 어찌어찌 배워왔는데 대학교에 들어가니 한문 시간이 따로 없었고, 
그러곤 한국을 떠났으니까. 미국에 간 지 1년쯤 되었을 무렵, 
중국의 고전을 한문으로 충분히 공부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애통한 마음이 들었다. 
미국인들이 그리스 고전을 공부하듯, 동아시아 문화권의 한 사람으로서 나도 고전을 더 공부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은 했지만 막상 영어를 배우기에도 바빴던 내가 한문 공부를 할 리 없었고 나는 점차 까막눈이 되어갔다. 
한국에 와서 글씨 전시를 보러 다닐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난 글씨 앞에서 드로잉을 감상하듯 열심히 선의 강약이며 
구부러짐과 펴짐이며 의외의 형태 등을 살폈다. 아닌 게 아니라 미국의 화가 브라이스 마덴은 중국 당나라의 승려 시인 
한산(寒山)의 시를 쓴 글씨에 영감을 받아 'Cold Mountain'이라는 연작을 전개했다. 
그의 연작은 영민하고 창조적인 서양의 '까막눈'이 한자를 보고 따라 그린 그림이었다.


	[일사일언] '까막눈'이 한자를 그릴 때
나도 한자를 따라 써 볼 기회가 생겼다. 
요즘 얼결에 '고문진보'를 배우고 있는데 지난 시간 숙제가 왕희지의 '난정기'를 그대로 베껴 쓰는 것이었다. 
혹자는 실제로 왕희지가 쓴 '난정기'는 없다지만, 우리는 왕희지가 썼다는 글씨를 복사본으로 나누어 받았다. 
숙제를 하다가 좌절감만 느낀 나는 서예를 한 적이 있는 지인에게 조언을 구했다. 
지인은 첫째, 먹을 갈며 몸에 힘을 빼고 
둘째, 붓을 세우라고 했다. 그러면서 붓은 칼이라고, 매 순간 얼마나 찔러야 할지를 정하라고 했다. 
아, 나는 마침내 동아시아 문화권의 그 심오한 '드로잉'을 배우게 되는가. 
허리를 펴고 붓을 세웠다. 두려움이 약간 사라졌다. 
잃어버린 내 고전 교육을 이렇게, 온몸으로 되찾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