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國際·東北亞

[기고] 무라야마와 아베의 인연에 숨어 있는 것

바람아님 2015. 5. 26. 10:44

(출처-조선일보 2015.05.26 와카미야 요시부미 前 아사히신문 주필)


	와카미야 요시부미 前 아사히신문 주필
와카미야 요시부미 
前 아사히신문 주필
21년 전 사회당 당수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일본 총리가 된 것은 기상천외한 사건이었다. 
게다가 불과 1년 반의 재임 중 '전후(戰後) 50주년'을 맞이한 것은 신(神)의 선물이었을까. 
'무라야마 담화'가 세상에 나온 것은 1995년 8월 15일이었다.

지난주 조선일보 주최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ALC)에 참석한 무라야마 전 총리는 강연에서 
"총리에 오른 이상 역사에 남겨진 과제를 정리하고 싶었다"고 당시 심경을 말했다. 
강연에서 발언을 요청받은 나는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무라야마 담화가 빛을 보게 된 것은 
아베 신조 총리 덕분"이라고 농담 섞어 말했다. 
이번 여름 아베 총리가 발표할 '전후 70주년 담화'를 많은 사람이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라야마와 아베는 대조적인 정치인이다. 
1960년 아베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는 미·일 안보조약을 개정했다. 
그때 기시 총리를 퇴진까지 몰고 간 시위대 안에 청년 무라야마가 있었다. 
어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고학으로 성장한 인물이다. 
당시 아베는 다섯 살이었다. 훗날 과반 의석에 실패한 집권 자민당의 부탁으로 총리가 된 무라야마가 자신의 
외조부가 만든 안보조약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을 때 아베는 가슴이 후련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라야마 총리가 그 대신 신념으로 관철한 것이 무라야마 담화였다.

아베의 외조부인 기시 전 총리는 태평양전쟁 개전(開戰) 당시 각료였고, 전후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됐다. 
기소를 면하고 석방됐다고 해도 기시 전 총리는 전전(戰前)의 연속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국가 정책의 잘못으로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는 바로 그 연속성을 끊는 의미가 있었다. 
신인 국회의원이었던 아베는 이때도 무라야마에게 당했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이런 심리가 아베 담화에 대한 집념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승부가 되지 않을까. 한·중만이 아니라 미국도 역사 인식에서는 무라야마 편이다. 
일본 내에서도 무라야마 담화에 대한 지지율이 높다. 
이런 분위기에서 아베 총리 역시 무라야마 담화의 계승을 표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구체적 문구까지 자기 생각을 양보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기시 전 총리를 반공(反共)의 리더로 키우려고 했던 것은 미국이었다. 6·25전쟁도 배경에 있었다. 
안보조약 개정 후 퇴진한 기시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지원하고 한국 경제의 응원단장 노릇도 했다. 
아베 총리는 외조부의 이런 일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반면 무라야마 전 총리는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했다. 
그런 그가 지금 한국에서 대환영을 받고 아베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정상회담까지 거부당하는 현실은 아이러니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결단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 아닌가.

냉전의 종결, 한국의 민주화, 한·중 관계의 호전 등 전후의 대변화를 아베 총리는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한국 역시 국교 정상화 당시의 역사와 한국의 경제를 지원한 일본의 역할을 되돌아봤으면 한다. 
아베 총리를 비판하면서도 '전후 일본의 역할'을 믿는 아베 총리의 자존심을 생각하는 여유도 필요하지 않을까.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앞두고 한·일 두 정상의 도량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