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일사일언] 더위도 못말리는 한국인

바람아님 2015. 5. 27. 10:11

(출처-조선일보 2015.05.27 팀 알퍼·칼럼니스트)


	팀 알퍼·칼럼니스트 사진
팀 알퍼·칼럼니스트

"이 세상에서 햇살이 강한 한낮에 바깥에 나가는 건 미친개와 영국인뿐이다." 

영국의 위대한 극작가이자 배우였던 고(故) 노엘 카워드 경(卿)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스페인 사람들은 한낮이면 시에스타(낮잠)를 즐기는 걸로 유명하다. 

더운 아랍 국가에 사는 사람들도 오후면 '카이롤라'라고 하는 낮잠을 즐긴다고 한다. 

영국인인 나는 이전엔 카워드 경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의 난 그 확신을 버렸다.

작년에 나는 어떤 이유로 6월 마지막 주에 열리는 달리기 대회에 참가해 가까스로 10㎞ 코스를 완주했다. 

결승선을 통과하자마자 그늘에 주저앉아 생수를 온몸에 끼얹었는데도 심장이 갈비뼈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날 내가 1㎞만 더 뛰었어도 지금쯤 병원 침대에 누워 이 글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대회 참가자 절반 이상이 하프마라톤 코스를 완주했고, 마라톤 풀코스를 뛴 사람도 몇몇 있었다. 

섭씨 30도에 습도 79%인 6월의 한낮, 그늘 한 점 없는 한강변을 따라 달리는 대회였는데도 말이다.

더 수수께끼 같았던 광경은 그 땡볕 아래서 수십㎞를 달리고 난 사람들이 엄청나게 기름진 음식을 먹는 모습이었다. 

나는 달리기를 끝낸 뒤 수박에 얼굴을 파묻고 먹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풀코스 마라톤을 마친 한국 사람들은 족발이나 프라이드 치킨, 제육 볶음 같은 음식에 막걸리를 들이켜고 있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한국엔 이런 강철 같은 아마추어 마라토너들 외에도 이글대는 여름 태양 아래 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몇 년 전 내가 활동하던 조기축구회에선 이런 일이 있었다. 

7월의 한낮에 경기하던 중 한 20대 중반 팀원이 갑자기 쓰러졌다. 

열기 속에서 열심히 뛰다가 의식을 잃은 것이다. 

사람들이 찬물을 끼얹는 사이 누군가 구급차를 불렀다. 

하지만 몇 분 뒤 그 청년은 정신을 차렸고, 우리는 구급차를 돌려보냈다. 

벤치에서 5분 정도 쉰 뒤 경기에 복귀한 그는 토끼처럼 깡충대며 그라운드를 누볐다. 

심지어 한 골 넣기도 한 것으로 기억한다.

인정한다. 카워드 경은 완전히 틀렸다. 

미친개와 영국인들이 한낮의 미칠 듯이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걸어 다닐 때, 

한국인들은 기꺼이 그 더위 속을 뛰어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