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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킹청의 중국정치 뚫어보기(22) 이 카테고리의 다른 기사보기 중국에 여전히 홍콩이 필요한가?

바람아님 2015. 5. 31. 16:44

(출처-조선일보 2014.09.24 찬킹청(陳景祥)홍콩 신보 총편집인)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후로 정치제도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지난달 31일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가 홍콩 행정장관 직접·보통 선거의 틀을 마련하면서 
홍콩의 정치제도가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중국 정부는 홍콩의 보통선거(직선제)가 국가의 안보에 직결되는 문제로,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될 행정장관은 반드시 나라와 홍콩을 사랑하는 ‘애국 인사’여야 한다고 수차례 밝혀왔다. 
이를 위해 중국은 홍콩 행정장관 후보자 입후보 단계에서부터 ‘검증 절차’를 도입해 결국 중국이 지지하는 사람만이 
선출될 수 있도록 원칙을 마련했다. 
이 원칙을 빌어 중국이 홍콩의 행정장관 선거에 개입하여 ‘항인치항(港人治港·홍콩인이 홍콩을 다스린다)’이라는 원칙을 
뒤흔들고 있다는 홍콩인의 지적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홍콩 행정장관 선거가 정권의 향방에 관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반드시 중국 정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당선되어야 한다며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당시에는 홍콩과 마카오, 타이완이 분리되어 있었다. 
70년대 들어 덩샤오핑(邓小平)이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에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 공존)’를 제시하며 
이 지역과 중국 간에 존재하는 제도와 생활방식의 차이를 인정함과 동시에 통일의 청사진을 그려왔다. 
중국과 영국이 홍콩의 미래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중국은 ‘일국양제’, ‘고도자치(高度自治)’, ‘항인치항’의 원칙을 내세우며 
홍콩을 안정적으로 발전시키고 홍콩의 생활방식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밝혔다. 그 결과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었고, 
‘일국양제’라는 원칙 덕분에 홍콩은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를 따르지 않고 그동안 유지해 온 자본주의제도와 가치관을 
유지해나갈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전례 없는 시도인 ‘일국양제’ 하에 홍콩은 자신들만의 행정·입법·사법제도와 영국의 영향을 받은 관료제도를 
유지해나갔다. 그 결과 중국보다 홍콩이 서구사회의 가치관에 더욱 친숙해졌다. 또한, 홍콩은 고도의 자치권을 가지고 있어 
기본법에 명시된 경우와 국방, 외교 분야를 제외하면 정치적으로 중국이 홍콩에 개입할 수 없다.

홍콩 야당 국회의원들이 1일 홍콩 행정장관 선거 설명회장에서'신뢰를 잃었다(失信)', '부끄러운 줄 알아라(可恥)'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리페이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 부비서장을 비난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이날 리페이 부비서장은 시위대 반발에도

홍콩 야당 국회의원들이 1일 홍콩 행정장관 

선거 설명회장에서'신뢰를 잃었다(失信)', 

'부끄러운 줄 알아라(可恥)'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리페이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비서장을 비난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이날 리페이 부비서장은 시위대 반발에도

"홍콩이나 중국을 사랑하지 않는 이는 

홍콩 행정장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2017년 홍콩 행정장관 선거에 반(反)중국 

인사의 입후보를 제한하는 내용을 발표했다.

/AP 뉴시스

그렇다면 중국이 어째서 홍콩에 폭넓은 자치권을 허용했을까? 
이 문제에 답을 찾기 위해서는 중국의 근대 발전에 홍콩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그 특수성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1842년 홍콩이 중국에서도 가장 먼저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으며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하지만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홍콩은 서양의 문명을 배워나가며 중국과 서양의 문화를 잘 융합해왔다. 
과거 홍콩에서 유학하던 쑨원(孫文)이 낙후된 중국과는 달리 영국의 지배하에 놓인 홍콩은 제도와 사회적 체제가 
잘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을 정도였다.

청나라 말부터 중국의 국력은 급속도로 쇠하기 시작했고, 열강의 침략에 나라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양의 문명을 배우고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나라를 바로 세우고 열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이 많아졌다. 이들이 주장한 대로 서양의 문명을 배우기 위해서는 홍콩이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홍콩은 서구화된 중국이었고, 정치적 견해가 다른 이들을 보호하고 청나라 정부가 ‘반역자(대부분이 서양을 배우자고 주장한 
개혁파)’로 낙인 찍은 이들에게 은신할 곳을 제공해주었다. 또 홍콩은 공산당원들이 국민당의 추격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였다. 
그리고 1949년 중국 성립 직전, 중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주요 지식인과 문화인들이 홍콩에 먼저 들어와 중국이 안정되기를 
기다려 공산당원들의 보호 하에 중국으로 돌아갔다. 즉, 중국의 근대사에서 홍콩은 중국의 혁명과 진보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특수한 의미를 가진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일국양제’가 임시방편이 아니라 홍콩이 자신들의 체제를 지켜나가게 하기 위한 중국 정부의 진정성있는 
원칙이라고 주장한다. 1978년 개혁개방이 실시된 후, 외자유치·경영·기술도입·인재육성 등 여러 분야에서 홍콩이 중국의 
현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중국의 개혁개방의 성공 여부가 불투명했던 때에도 홍콩의 많은 기업들은 중국에 투자했다. 성패와 상관없이 이들이 훗날 
중국의 경제 발전에 기초를 마련해 준 덕분에 30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순조롭게 국제질서에 편입될 수 있었다. 
여러 시범 조치를 거듭하며 중국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으며, 이 모든 것이 홍콩의 특별한 역할에서 비롯했다.

중국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지금, 홍콩에게는 어떤 역할이 기대될까? 
행정장관 직접 선출을 위한 홍콩인의 요구가 빗발치던 지난 6월 10일, 중국 국무원이 ‘일국양제’에 관련된 백서를 발간하며 
중국 중앙 정부가 홍콩 특별행정구역의 전면적인 관할권을 가진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중국 관료들 역시 홍콩 행정장관 
보통선거는 국가의 안보에 관련된 문제로 중앙 정부가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 정권을 잡도록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 여러 차례 
밝혀왔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홍콩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관용을 보이던 중국은 이제 ‘하나의 국가’를 강조하며 
홍콩의 자치권을 제약하고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이제 중국에 홍콩은 더는 특별하지 않으며 더 이상의 특별대우는 없을 
것을 예고하는 것은 아닐까?

홍콩 행정장관 보통선거에 관한 전인대 상무위원회의 결정은 홍콩에 큰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중앙 정부가 홍콩의 보통선거에 개입하며 중국의 다른 도시와 홍콩을 동일시한다면 홍콩 뿐 아니라 
중국에도 아무런 이득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