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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사랑! 참 묘한 놈

바람아님 2015. 6. 25. 07:56

(출처-조선일보 2015.06.25  길해연·배우)


	길해연·배우 사진
길해연·배우
친한 후배의 전화, 시간을 보니 새벽 3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겁부터 더럭 났다. 
고생만 하다가 요즘 부쩍 바빠진 그녀.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지자마자 안 좋은 일들이 연달아 생겨 한동안 힘들어했기에 '혹시?' 하는 
걱정부터 앞선 것이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녀는 자기 얘기를 쏟아놓았다. 
내용인즉 "일 끝나고 회식 자리에서 한 남자를 우연히 만났다. 
그런데 둘 사이에 무언가 찌르르 전기 같은 것이 통한 것 같다. 혹시 혼자만의 착각은 아닐까. 
그 남자가 얼핏 손을 잡았을 때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그 남자, 선수는 아닐까. 
지금 한창 열심히 일에 매진해야 하는데 이런 감정, 사치 아닐까."

내버려 두면 아라비안나이트를 새로 쓸 판이었다. 
지옥과 천국을 널뛰기하듯 옮겨 다니는 그녀의 이야기를, 나는 웃음과 한숨의 추임새를 섞어가며 밤새 듣고만 있었다.

그러고 난 며칠 후 다시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 어제 비 왔잖아. 둘이 아무 말도 안 하고 밤거리를 계속 걸었어."
 "언니, 완전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이야. 수줍어서 고개를 못 들어." 
그녀는 점점 웃음이 많아졌고 건조했던 목소리에는 윤기마저 흐르기 시작했다. 
마흔 중반에 소녀가 된 그녀는 자신이 만나는 소년의 소식도 잊지 않고 전해 주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그 남자,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챙기는 일에 익숙지 않다던 그녀의 남자가 그 소녀를 

위해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치장하기 시작했고 앞날을 위해 계획을 세워보는 일도 생기고 많은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녀를 만나고 그 남자 또한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고 뿌듯해하고 있는 그녀를 보니 내 마음까지 푸근해지는 

것 같았다.


"언니, 이거 사랑 맞지?"

사랑! 입에 물고 있던 사탕이 툭 튀어나온 것처럼, 나이 든 두 여자는 잠시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다 여고 시절의 어느 날처럼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늘 보던 풍경이 낯설 때가 있지요. 세상이 새로 보이면 사랑이지요." 

김용택 시인의 말로 대답을 대신하는 지금, 내 입가엔 또 비질비질 웃음이 번진다. 

사랑! 그거 참 묘한 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