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7.07
이철호/논설실장
솔직히 삼성과 엘리엇 싸움에서 누가 이기느냐보다 후유증이 더 큰 문제다. 정부는 1961~81년 고도성장기에 주식 상장을 적극 권장했다. 은행의 고금리 대출 대신 증시에서 안정적 자본을 끌어들이고, 한정된 돈으로 더 많은 투자를 끌어내기 위한 포석이었다. 상장회사에는 비상장회사보다 파격적인 세제 우대정책까지 폈다.
지금은 판이 완전히 달라졌다. 우선 저금리로 돈이 넘쳐난다. 알짜기업이라면 굳이 기업공개로 돈을 끌어모을 까닭이 없다. 싼 금리로 대출해 주려는 은행들이 줄을 서 있다. 외환위기 이후 비상장회사의 세제 불이익도 사라졌다. 오히려 기업을 승계하려면 비상장회사가 상속세도 덜 내고 훨씬 유리한 편이다.
눈치 빠른 외국계 기업들부터 꼬리를 물며 서울 증시를 탈출하고 있다. 미국의 이베이가 인수한 옥션과 G마켓이 2004년부터 차례로 자진해 상장 폐지했다. 2010년엔 글로벌 바이오업체 인버니스가 에스디를 인수한 뒤 상장 폐지시켰다. 최근 이런 흐름에 속도가 붙었다. 일본 아사히글라스가 인수한 한국전기초자와 히타치가 합병한 국제엘렉트릭이 증시에서 발을 뺐다. 중국계인 3노드디지탈·중국식품포장도 마찬가지다. 일본 도레이가 인수한 도레이케미칼(옛 웅진케미칼)도 스스로 상장 폐지할 움직임이다.
더 불길한 징조는 국내 알짜기업들의 몸 사리기다. 자산 2조원 이상의 국내 비상장업체는 2007년 39개에서 지난해 60개로 늘었다. 이들 중 매년 2~5개였던 기업공개 건수가 2012년 이후 해마다 ‘0’이다. 아무도 상장을 안 하려는 분위기다. 자산 3조원대의 한 오너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세금을 내거나 자식에게 기업을 물려줄 때도 비상장이 유리하다. 다른 주주의 눈치를 보느라 단기 실적에 매달리면 중장기적 경영이 어렵다. 지난 10여 년간 삼성·SK·KT&G가 소버린, 칼 아이컨, 에르메스, 엘리엇 같은 악질 투기꾼들에게 꼼짝없이 당하는 걸 보면 솔직히 겁도 난다.” 우리 사회에는 반(反)대기업 정서가 뿌리 깊다. 여기에다 해외언론·신용평가사·의결자문기관까지 등에 업은 외국 기업사냥꾼의 공격이 시작되면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다는 것이다.
참고로 미국의 초일류기업들과 비교해 보자. 구글은 1주당 1개 의결권의 A주식과 1주당 10개 의결권의 B주식이 있다. 구글 공동 창업자들은 B주식의 92.5%를 갖고 전체 의결권의 60.1%를 지배한다. 말도 안 되는 불평등이지만 엄연히 합법적인 ‘차등 의결권’이다. 김상헌 네이버 대표는 “구글은 이런 강력한 경영권을 배경으로 10년간 유튜브·안드로이드·더블클릭 등 200여 개 업체를 재빨리 인수해 전방위 영토를 구축했다”고 말했다. 구글의 시가총액은 410조원을 넘었다. 이뿐 아니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도 1주당 10개 의결권을 누리고, 그 유명한 워런 버핏은 버크셔해서웨이의 1주당 무려 200개의 의결권을 자랑한다.
소액주주 보호는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경영권 보호장치도 반드시 필요하다. 기업이 경영권을 위협받으면 지분 사들이기에 혈안이 돼 투자에 손을 놓기 마련이다. 더 많은 알짜기업이 마음 놓고 기업을 공개하고, 더 많은 자본으로 활발한 투자가 이뤄져야 일자리가 늘어난다. 아무리 불 구경과 싸움 구경이 최고라지만 지금은 우리의 경영권 보호가 적정 수준인지 되짚어 볼 때다. 외국계 기업부터 서울 증시에서 짐을 싸고, 알짜 중견기업들은 증시 상장을 꺼린다. 삼성이 이런 정도라면 현대차·SK·현대중공업 등도 차례차례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다. 엘리엇은 지금 삼성을 넘어 한국 전체를 물어뜯고 있는지 모른다.
이철호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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