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5.07.08 김태훈 문화부 차장)
인간의 자유로운 영혼을 찬미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는 읽는 이의 마음에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불어넣는다. 조르바의 거칠 것 없는 행동은 온갖 제약에 묶여 사는 독자의
부러움도 자아낸다. 소설 속 일인칭 화자(話者) 역시 조르바에 매료돼 이렇게 제안한다.
"내가 돈을 댈 테니 크레타 섬에 가서 함께 갈탄을 캐자."
그런데 조르바가 배짱을 튕긴다.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놓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요(…)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그는 "인간은 자유라는 뜻"이라고 덧붙인다.
소설이 발표되고 70년간 그리스인들이 구가한 '자유'의 결과가 천문학적 빚에 눌려 허덕이는 그리스의 현실이다.
소설 속 조르바는 무일푼의 떠돌이로 당장의 자유를 위해 가족에 대한 책임과 자신의 미래를 버린 인물이다.
손대는 사업을 말아먹을 때마다 노래하고 춤추며 훌훌 털어내는 그의 자유는 무책임과 동의어다.
5일 국민투표에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돈을 모아 빚을 갚으라'는 긴축안을 걷어찬 치프라스 총리나 그의 동조자들은
그런 의미에서 '조르바의 후예들'이다.
조르바는 갈탄 광산 운영 자금을 술과 매춘에 유용하고 이런 편지를 쓴다.
"용서하십시오, 두목. 당신 돈을 조금 썼습니다." 그러고는 곧바로 황당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두목의 천당은 책이 잔뜩 쌓이고 잉크가 됫병으로 한 병 놓인 방일지 몰라도 내 천당은 벽에 예쁜 옷이 걸려 있고
침대는 말랑말랑하며 옆에는 암컷이 누워 있는 향긋한 방입니다."
조르바의 후예들도 이에 못지않다.
내야 할 세금을 빼돌리고 방만한 재정 운용으로 구멍 난 나라 살림을 3200억유로의 빚으로 메웠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돈을 뜯긴 화자가 오히려 조르바를 두둔한다.
자신의 돈을 빼돌려 술과 여색(女色)을 탐한 '조르바의 자유'를 두고
"내가 찾아 헤매던 진짜 광맥(鑛脈)"이라고 치켜세웠다.
작가는 이를 통해 조르바의 자유를 찬미하려 했지만 빌려준 돈을 떼일 처지에 몰린 메르켈 독일 총리가
이 대목을 읽는다면 기가 막혀 책을 집어던질 게 뻔하다.
그리스는 관광이 GDP의 20%에 육박하고 제조업 기반은 허약하다.
조르바는 사업이 망하자 악기 하나 달랑 들고 그리스를 떠나 다른 나라를 떠돌며 팔자 좋게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야 할 조르바의 후예들은 파산 이후 쓰레기통을 뒤진다.
이번 국민투표로 그리스는 유로화(貨)를 떠나 옛 화폐 드라크마로 돌아갈 가능성이 커졌다.
하지만 휴지 조각에 불과할 게 뻔한 드라크마화는 조르바처럼 먹고 마시고 놀 자유를 주지 못할 것이다.
관광으로 먹고사는 그리스는 조르바처럼 살기보다 세계를 향해 "그리스에서 조르바처럼 놀다 가라"고 해야 했었다.
그러고는 죽기 살기로 관광객의 손과 발 노릇을 해서라도 돈을 벌고 빚을 갚아야 했다.
그리스 사태를 지켜보며 펼쳐든 '그리스인 조르바'는 인간의 자유를 상징하기보다 멋대로 사는 삶을 경계하는 타산지석으로
읽힌다. 그건 그리스인들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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