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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영국인도 모르는 '한국 영어'

바람아님 2015. 7. 15. 10:16

(출처-조선일보 2015.07.15  팀 알퍼 칼럼니스트)


팀 알퍼 칼럼니스트나는 힘들게 한국어를 배웠다. 
이곳에서 10년 가까이 살았지만, 여전히 대화하거나 이메일을 쓸 때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쓴다. 
그러다 보니 한국인들도 수많은 영어 단어를 마치 한국어처럼 쓴다는 걸 알게 됐다. 
"컨디션이 안 좋다" "치킨이 먹고 싶다" 같은 말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한다. 
나처럼 한국어에 서툰 영어권 사람도 그런 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한국인은 말에 영어를 너무 많이 섞어 쓰는 바람에 나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그럴 땐 내가 어느 나라에 사는지 어리둥절할 지경이다. 
한국인들이 영어 단어를 섞어 쓰는 건 내 모국인 영국인들이 평소 말할 때 불어를 섞어 쓰는 습관과 비슷하다. 
많은 영국인이 "I know about this(난 이걸 알아)"라는 말을 할 때 
굳이 "I am au fait(잘 안다는 뜻의 불어) with this"라고 말한다. 
불어를 섞어 쓰는 영국인들은 상대방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길 은근히 기대하는 것 같다. 
상대방이 못 알아들으면 자신이 이기는 것이다.

요즘 한국엔 그저 영어 단어를 많이 섞어 쓰는 수준을 넘는 경우도 많다. 
예컨대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의 약어로 고객 관계 관리란 뜻이다)' 같은 낯선 영어 축약어를 마구 섞어 
말하는 것이다. 그런 두문자가 섞인 말을 들을 땐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로봇 이름을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 말은 현대 한국어라기보다는 서기 3535년쯤에나 쓸 법한 한국어 같다.

[일사일언] 영국인도 모르는 '한국 영어'
지난달 나는 업무 때문에 '미팅'을 하면서 'FPTX'란 말을 듣게 됐다(지금도 FPTX가 뭔지 모른다). 
회의 중에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B2C팀에 있는 직원 하나가 'FPTX'가 뭔지 모른다고 말하더라고.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 그 말에 나를 제외한 전원이 박장대소했다. 
그 순간 나는 미래에서 온 외계인 무리 속에 낀 원시인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숨어 들어갈 만한 동굴이 있다면 좋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