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일사일언] 진정한 치료제, 사과

바람아님 2015. 7. 17. 09:30

(출처-조선일보 2015.07.14 정재찬·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


정재찬·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 사진"참 후덕하게 생겼네요." 뚱뚱하다는 말이다. 
"머리는 참 좋은데 성적이 안 오르네요." 게으르다는 얘기다. 
이런 식으로 돌려 말하는 것을 완곡어법이라고 한다. 
이는 기만이 아니므로 전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그걸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쪽이 답답한 노릇이지, 무슨 뜻인지 서로 알면서 으레 그렇게 수작하는 
것은 일종의 예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려 말하는 표현은 곧바로 말할 때의 불쾌함을 잠시 잊게 할 뿐, 시효가 오래가지 않는다. 
자꾸 쓰다 보면 불쾌해진다. 
우리네 소화기관이 마지막 성스러운 업무를 치르는, 그 생리현상의 성소를 일컫는 이러저러한 말들을 생각해 보라. 
성·죽음·질병·범죄 등과 관련한 단어가 많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완곡어법은 통증의 완화제이지 치료제는 아닌 것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이런 어법은 국가 간의 외교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양국이 의견을 달리한다는 데 인식을 함께했다"와 같은 기이한 표현도 그 속사정을 헤아려보면 너그러이 이해해줄 만하다. 

내용상으로는 결렬에 해당하지만 표면상으로는 합의를 거둔 셈, 그래야 다음 회담을 기약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언어의 힘에 의해 뭔가를 왜곡 또는 은폐시키고자 하는 기능을 행하고 있다는 점 또한 놓쳐서는 안 된다.

최근 기시다 일본 외상이 '강제로 노역하게 된(forced to work)'이라는 표현을 놓고 그것이 강제노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하여 시끌벅적한 모양이다. 

이런 수사법에 대해서는 일찍이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일단 좋게 들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완곡어법이 아니요, 

예의가 아니라는 점에서 외교적 수사도 아님이 분명하다. 

이런 돌려 말하기는 수사법이 아니라 형법에서 찾아야 하리라. 전문용어로 사기 또는 기망(欺罔)이 바로 이런 거 아니겠는가. 

그렇게 왜곡한다고 진실이 은폐되지도 않고, 자꾸 반복하면 누범만 될 뿐인데, 

'통석의 염' 이래 일본 정부는 요상한 말만 바꿔 쓰니 진실로 통석의 염을 금할 길이 없다. 

고통의 역사에 대한 치료제는 진정한 사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