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活文化/性 ·夫婦이야기

몸에서 시작되는 여자의 사랑

바람아님 2015. 7. 25. 00:36

백영옥의 심야극장 <2> 색, 계

중앙SUNDAY| 제426호 | 20150510 입력

 

일러스트 김옥

 

욕망을 뜻하는 색(色), 신중을 뜻하는 계(戒).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던 해에 홍콩으로 간 왕치아즈(탕웨이)는 영국으로 자신을 불러주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대학 연극부에 가입한다. 그녀는 연극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급진파 광위민(왕리홍)을 좋아하면서 그가 주도하는 항일단체에 깊이 개입한다. 그들은 친일파의 핵심인물 ‘이’를 암살하기로 결정하고, 왕치아즈는 홍콩의 젊은 수출입상 막사장의 부인 역할을 맡아 ‘이’를 은밀히 유혹한다. ‘색, 계’는 전형적인 스파이물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만, 스파이의 ‘황량한 내면 풍경’을 (침대에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투성을 비껴간다.

나는 ‘색, 계’를 세 번 봤다. 처음 봤을 때, ‘탕웨이 겨털’ 논란 때문에 난데없이 ‘제모’의 문화사가 술자리 여기저기에서 폭발하는 걸 봤다. 남성도 겨드랑이와 성기 주위를 깨끗하게 제모하는 게 요즘 유럽 트렌드를 넘어 ‘매너’라는 말부터 면도기 회사 ‘질레트’의 광고 카피(겨드랑이에 털이 있는 여성은 아름답지 않다!)와 음모론을 거론하는 선배의 말까지 화젯거리는 다양했다. 어째서 사람들은 이런 사소한 디테일에 집중하는 걸까. 탕웨이를 검색하면 ‘겨드랑이털’이 연관 검색되던 시절은 영화 ‘러브 픽션’ 속 공효진의 기념비적일만큼 무성한 ‘겨털’을 끝으로 마감되긴 했지만 말이다.

두 번째 보았을 때는 정사 장면이 아닌 양조위의 맨 얼굴이 보였다. 그것은 10대와 20대를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자란 나 같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낭만을 깨는 일이기도 했다. 눈빛만으로 사방 몇 m 안의 공기를 차분하고 고요하게 만드는 저 식물성 눈빛이 어떻게 ‘이’의 악랄한 동물성을 대변할 수 있는지, 나는 그의 내면 풍경을 침대 위에서, 일식집에서, 미로 같은 집 안의 어둠 속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색, 계’를 세 번째 보았을 때에야 비로소 탕웨이가 보였다. 2차 대전 이후의 식민지 중국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들어내면, 마지막에 남게 되는 순수한 욕망 같은 것 말이다. 일본 앞잡이 ‘이’를 제거하려는 ‘왕치아즈’의 욕망이 어쩌면 조국을 위한 구국활동이 아니라, ‘연기’라는 예술 그 자체에 대한 열망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것이 이 영화를 읽던 코드, 즉 ‘성욕’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발견이었다.

연기로 시작해 실제가 돼가는 ‘적과의 동침’
『선악을 넘어서』에 나오는 니체의 유명한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 볼 때,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보고 있으니…”라는 말은 이때, 예술가가 어째서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통해 작품에 지나치게 몰입하는지를 설명한다. 에이미 와인하우스, 히스 레저, 어니스트 헤밍웨이…. 자신이 연기하거나 창조해낸 캐릭터에서 벗어나지 못해 요절하거나, 자살을 선택한 예술가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 양조위 역시 ‘이’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는 고백을 여러 차례 한 바 있다.

영화를 만든 이안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색, 계’를 “연기에 관한 내 자전적인 논문”과 같다며 이런 말을 했다.

“그 누가 사람의 성행위 자체가 공연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 쾌락도 연기해야 하고 거짓 오르가슴도 표현한다. 왕치아즈가 겪는 혼란은 결국 처음에는 연기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던 일이 점점 자신의 실제가 되어가고 있음을 깨닫고 받게 되는 충격과도 같다영화에서 여러 번의 정사 장면이 있지만 어떤 장면을 두고 연기를 하는 거짓행위인지 진짜 사랑하는 것인지 분간하기는 힘들다. 사랑도 결국 연기일 수 있으니까.”

연기란 무엇인가. ‘마음’을 다해 ‘몸’을 쓰는 행위다. 사랑은 또 무엇인가. ‘마음’을 다해 ‘몸’을 쓰는 가장 구체적 방법론이다. 사랑이 연기와 비슷하다는 말은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가 스스로 정의한 ‘나’라는 ‘정체성’에서 얼마까지 멀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사랑에 빠진 상대편이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자주 스스로를 ‘교정’하고 ‘비난’하고 ‘포기’하는가.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모두 ‘연기하는 배우’가 된다. 상대편만이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는 제 몸뿐 아니라 한 마리 뱀처럼 제 마음까지 파고들어 옵니다. 더 깊숙이. 저는 노예처럼 그를 받아들여야 하고, 제 감정에 충실해야만 그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매번 그는 저를 절정에 몸부림치고 울부짖게 해야만 비로소 안심하고 자신이 살아있음을 실감합니다. 그 어둠 속에서. 그만이 제 감정이 진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 역시 진이 빠지고,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그를 원하게 되는 겁니다. 그의 몸에 힘이 빠지는 그 순간, 난 당신들이 쳐들어와 그를 향해 총을 쏘고, 그의 피가 내 몸 위에 뿌려지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갈등하게 됩니다.”

여자의 사랑에 대한 통념을 뒤집다
왕치아즈의 고백처럼 ‘색, 계’는 또한 여자의 사랑이 ‘몸’에서 시작될 수도 있음을 선언한다. 종족 번식이 유전자의 유일한 목표인 남자는 사랑 없이도 여자와 섹스할 수 있지만, 여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통념을 뒤집는 것이다. 외도와 난교, 그것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진화 심리학의 과정으로만 이해하려는 일부 구태의연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점에서 ‘색, 계’는 흥미로운 텍스트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제대로 표현조차 되지 않은) 탕웨이의 죽음인데, 이것은 영화 ‘블랙 스완’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완벽한 흑조’를 연기하기 위해 자기분열과 모멸감에 시달린 발레리나 니나가 결국 그토록 도달하고 싶어 했던 ‘완벽한 흑조’가 되는 순간, 죽음 같은 나락으로 떨어지던 강렬한 엔딩 장면 말이다.

탕웨이는 제거해야 할 대상을 실제 사랑하면서까지 ‘연기’라는 예술혼을 불살랐다. 그녀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죽음으로써 다시 살아나는 예술의 부활을 상기시켰다. 고흐와 헤밍웨이와 베토벤 같은 위대한 선배들의 비극적인 죽음을 호출하면서 말이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전언처럼 그녀는 ‘이’의 곁에 잠시 머물렀을 뿐이지만, 그의 온 생애를 지배하는 트라우마가 되어 삶을 관통할 것이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그는 결코 평온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백영옥 광고쟁이, 서점직원, 기자를 거쳐 지금은 작가. 소설 『스타일』『다이어트의 여왕』 , 산문집『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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