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活文化/性 ·夫婦이야기

이별의 고통은 싫어 사랑없는 잠자리만 할거야

바람아님 2015. 7. 21. 09:21

[중앙선데이] 입력 2015.07.19 

백영옥의 심야극장 <7> 영화 ‘프렌즈 위드 베네핏’

 일러스트 김옥

 


한 후배가 헤어진 여자 친구를 가끔 만난다는 얘길 하길래, 다시 연애를 시작한 줄 알았다. 그런데 문득 그가 내 생각을 눈치챈 듯 “그냥 잠만 자는 사이”라고 말했다. 소위 ‘프렌즈 위드 베네핏’의 구남친 버전인 셈이었다. ‘프렌즈 위드 베네핏’은 감정 없이 섹스하는 친구 사이를 말한다. 이 말은 오랜 논쟁 하나를 연상시킨다. 남자와 여자의 우정은 가능한가? 이 문제에 관한 말들이 많지만 나는 이것과 관련된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야마다 에이미의 소설 『공주님』에서 발견했다.

“적어도 난 남자와 평생 우정을 유지할 만한 비범함을 가지고 있어. 이렇게 생기는 것도 쉽지 않다는 뜻이야. 못생기지도 예쁘지도 않으면서 대부분의 남자가 자고 싶어 하지 않는 얼굴이라는 거. 넌 너무 예쁘기 때문에 그런 특권을 누릴 수가 없는 거야. 넌 어떤 남자와도 친구가 될 수 없어. 대개의 남자들은 0.5초 만에 너와의 섹스 신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화장실 변기에 서서 마스터베이션을 하면서 우정을 키운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야. 대개 못생긴 여자들의 특권이라면 그것에서 남자를 제외시켜야 한다고 생각들 하지. 하지만 그건 전적으로 옳지 못해!”

프렌즈 위드 베네핏! 내가 생각하기에 연애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제거한 듯한 이 신조어의 핵심은 사실 ‘섹스’가 아닌 ‘이별의 형식’에 맞춰져 있다. 세상은 남자와 여자의 연결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부지런히 개발 중이다. 결혼정보회사, 미팅 사이트, 이름도 외우기 힘든 각종 소셜 네트워크…. 하지만 이별과 관련해 우리가 받는 감정적 애프터서비스는 얼마나 될까. 친구들의 살벌한 충고? (설마!) 부모님의 격려? 최근에 본 책 『클릭』에 의하면 이런 전망은 더 암담하다.

“‘아주 친한 친구가 몇 명이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대답은 오랫동안 큰 변화가 없었다.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은 ‘3’이었다. (…) 그런데 최근 갑자기 변화가 발생했다고 한다. 소셜네트워크의 붐이 일어나던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3이던 숫자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1명? 10명? 7명? 정답은 0이다.”

자본주의가 사랑을 권하는 이유
‘프렌즈 위드 베네핏’은 극심한 상실의 고통이 인생을 복잡하게 뒤흔들기 때문에 생긴 관계의 발명품이다. 이별살인, 카톡이별 등 이별과 관련된 수많은 병적 사례들은 이것을 증명한다. 헤어지던 순간, 카톡으로 서로 ‘정중하게’ 욕을 하며 헤어지는 사람들에 대한 얘길 했던 남자가 있었다. ‘쌍욕’을 하되 ‘정중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그것이 요즘 시대의 새로운 ‘쿨’이란 맥락이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중요한 건 ‘단점’을 감추기 위한 ‘장점’이란 결코 본질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험회사나 카드회사가 제아무리 “부자되세요!”라고 외치거나, 문화 공연의 주최자가 된다 해도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로 돈을 벌거나, 끝없이 빚을 권유한다는 사업의 본질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건 마치 ‘살인은 나쁘다’가 아니라 ‘좋은 살인은 나쁘지 않은 것이다’라는 말과도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꽤 유명한 심리학 실험 결과가 있다. 인간은 나중에 무엇인가를 두 배로 더 주겠다는 제안을 받더라도 지금 당장 가지고 있는 무엇을 조금 빼앗기는 상황을 훨씬 더 위협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새롭게 무언가를 얻게 될지라도 이미 가진 걸 빼앗기는 상실의 고통은 제어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연애, 특히 사랑에 있어 훨씬 더 극적으로 전개된다.

‘프렌즈 위드 베네핏’은 ‘단절’(이별)로 인해 생기는 고통의 양을 최소화시키고, ‘연결’(만남)을 통해 시작되는 쾌락의 양을 증폭시키려는, 어쩌면 인간적인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쾌락이란 언제나 과잉을 존재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끝내는 결핍의 감정을 만들어낸다. 거의 대부분 나쁜 결말이란 뜻이다. 요즘 유행한다는 ‘반동거 커플’처럼 고통 때문에 인간이 발명한 수많은 신종 관계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자본은 본질상, 사랑을 권유한다. 자본주의는 특히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경멸하는데, 그것은 철저히 돈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사랑 때문에 결혼 시장과 육아 시장, 사교육 시장이 열리고, 사랑이 파탄난 결과로 이혼 시장과 불륜 시장이 펼쳐진다. 자본주의는 사랑이 꽃피는 나무여야(만!)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랑 노래, 이별 노래가 득세하던 때가 있었던가. 이 시대는 남자가 필요 없는 여자의 이마에 ‘건어물녀’라는 주홍 글씨를 새기고, 여자보다 게임이 좋은 식물성 남자를 ‘잠재적 임포텐스 환자’라 진단한다. 우리는 지금 사랑과잉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녀 간의 사랑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남자와 여자의 우정은 가능한가
영화 ‘프렌즈 위드 베네핏’의 주인공 딜런이 뉴욕의 헤드헌터 제이미를 만나게 된 건 이들이 각자의 애인과 헤어져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조지 클루니처럼 일하고 섹스할 거야!”라고 결심한 주인공이 이별의 고통을 뒤로 한 채, 외로운 몸을 달래줄 방법을 찾다가 ‘아이패드’의 성경 앱에 손을 올려놓고 하던 “어떤 연애도, 감정도 없이, 서로 원할 때 섹스만 할 것을 맹세합니다”라는 서약은 어쩐지 우리 모두가 한 번은 꿈꾸던 희망처럼 읽힌다.

이전에 없던 관계를 모색하려면 지금과는 다른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새로운 도덕적 가능성을 타진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대체 ‘누구를 위한’ 도덕이냐는 질문이 첨언되므로 이것 역시 간단치 않다. 사실 사랑의 계보학을 따라 올라가 보면 애초에 ‘사랑’이란 불합리하고 병적인 상태를 일컫는 말이었다. 심지어 중세 프랑스에선 ‘사랑’은 그저 ‘성욕’이란 말로만 표현되었다. 그것이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전통적 결혼을 유지시키고 신분 유지와 생산의 입장에서 유리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사랑이, 사랑이 오염되기 전의 시절이 좋았다고 회상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늘 이 얘길 해준다. 전통적 결혼의 밑바탕은 ‘사랑’이 아닌 철저한 ‘거래’였다고 말이다.

남자와 여자의 우정은 가능한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성욕이 사라지고 나면 침대는 주말 공원의 나무벤치처럼 바뀐다는 말이다. 어쩌면 남녀 간의 우정은 사후적으로만 조심스레 싹트는지도 모르겠다. 나라면, 이미 잘 만큼 자고, 너덜너덜해진 연애를 겪고 난 후 헤어진 남자와 여자 사이엔 우정 비슷한 것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이론을 조심스레 타진해보겠다. 물론 이것이 정답은 아니다. 관계에 있어 정답 따위가 있을 리 없으니까. ●


백영옥 광고쟁이, 서점직원, 기자를 거쳐 지금은 작가. 소설『스타일』『다이어트의 여왕』『아주 보통의 연애』 , 인터뷰집 『다른 남자』 , 산문집『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등을 썼다.


[중앙일보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