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經濟(內,外)

[동서남북] '위안화 광풍'의 惡夢을 잊은 한국

바람아님 2015. 8. 17. 09:04

(출처-조선일보 2015.08.17 김기훈 디지털뉴스본부 콘텐츠팀장)


김기훈 디지털뉴스본부 콘텐츠팀장 사진서해 건너 중국에서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지난해 말 이후 금리를 수차례 내리더니 지난주에는 위안화 환율을 단 3일 만에 4.5%나 올렸다. 

나흘째 급브레이크를 걸었지만 언제든 다시 올릴 수 있다는 관측이 팽배하다.

환율은 국기처럼 한 국가의 가치를 상징한다. 그 중요성 때문에 금리정책과 재정정책에 이어 마지막으로 

쓰는 극약 처방이다. 극비리에 미세 조정하는 것이 국제 관례인 환율정책을 전 세계가 '위안화 충격'에 

빠질 정도로 과격하게 사용하는 걸 보니 중국 내부 사정이 어지간히 급하고 복잡한 것 같다.

중국의 과격한 환율정책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1년 전인 1994년에는 더 그랬다. 

1993년 집권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만성 무역흑자를 내는 일본의 팔을 비틀면서 엔고(엔 환율 하락)정책을 폈다. 

이 와중에 장쩌민 중국 주석은 위안화 환율을 대폭 끌어올렸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에 따라 수출 부문 일자리를 

늘리려는 조치였다. 위안화 환율은 1993년 달러당 평균 5.7위안에서 이듬해에 8.6위안으로 무려 51%나 올랐다.

중국이 움직이자 일본이 즉각 반응했다. 엔화 환율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환율은 1994년 1달러당 99.7엔에서 1998년 130.8엔까지 계속 상승했다. '미스터 엔'으로 불리는 

사카키바라 일본 대장성 재무관이 클린턴 정부와 비밀 협상을 벌인 뒤 환율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한국과 동남아 국가들은 이런 흐름을 타지 못했다. 환율이 상승하긴 했으나, 단번에 폭등시킨 중국이나 수년간 

차근차근 올린 일본에 비해 상승 폭은 작았다. 결과는 참혹했다. 수출업체들은 중국·일본 제품에 밀려 가격 경쟁력을 

상실했고 달러 창고가 부실해졌다. 1997년 태국, 인도네시아, 홍콩, 한국을 잇따라 강타한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중국 

책임론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21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은 내부 사정이 급하면 주변국 피해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국(大國)의 책임도 외면하기 일쑤다. 

일자리를 못 구한 농민공의 핏발 선 눈에 비치는 '제2의 톈안먼(天安門) 사태'조짐이 두렵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한국 1위 전자업체인 삼성과 1위 유통업체인 롯데는 

지난 두어 달간 외국 펀드와, 혹은 부자·형제간에 'OK목장의 결투'를 벌이느라고 에너지를 소모했다. 

그동안, 좁쌀이라는 뜻의 샤오미(小米)는 삼성전자와 같은 고급 패널을 채택한 48인치 TV를 50만원대에 내놓았다. 

두께는 1㎝가 안 되고, 무게는 12.7㎏이다.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는 자동차까지 인터넷 판매하겠다는 계획을 공개했다. 

이 중국 기업들이 환율 순풍까지 탔으니 한국 기업들을 얼마나 압박할까.

21년 전 동아시아 환율전쟁의 씨앗은 중국이 뿌렸다. 반면, 이번에는 일본이 2012년 말 엔저 정책으로 불씨를 댕겼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 중국이 시작했든, 일본이 시작했든 두 나라는 빠르게 움직인다. 그 덕택에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같은 환율 대재앙 때 두 나라 모두 무사했다.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보다 판단과 행동이 느린데도 정부는 여전히 "지켜보겠다"며 느긋한 입장이다. 세계 금융의 체스판이 

지각 변동을 하면서 저성장 위기의 한국 경제가 일본과 중국의 공세에 더욱 코너로 몰리고 있는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