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무려 9번이나 인신매매를 당한 한 중국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의 굴곡진 인생 역정은 다섯 살 때인 1995년 시작됐습니다. 산둥성의 어느 농촌 마을에 살던 어린 딸에게 찢어지게 가난했던 엄마 아빠는 고운 색동 치마와 새 신발을 신겼습니다.
아침부터 엄마는 근심어린 얼굴로 공들여 목욕까지 시켜 준 참이었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새 옷과 새 신발에 신이 나 마냥 들떠 있던 그녀의 눈에는 밖에서 은밀히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는 아빠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그날 다섯 살 어린 소녀는 이웃 마을 누군가의 집으로 민며느리도 팔려갔습니다. 정약 결혼을 약속하고 어릴 때부터 미래의 신랑의 집에 들어가 이런저런 집안일을 거들며 사는 봉건적인 악습인데 중국 농촌마을에서는 여전히 존속되고 있었던 겁니다. 어린 딸을 민며느리로 보낸 집에는 물론 물질적인 보상이 뒤따랐으니 사실상 인신매매인 겁니다.
하지만 민며느리의 삶은 순탄치 못했습니다. 집안 일에 도움도 못되면서 밥만 많이 먹는다는 이유로 수시로 구박을 받던 그녀는 1년이 채 안 돼 시댁 식구들에 의해 곡예단으로 팔려갔습니다.
이때 그녀의 몸값으로 지불된 돈은 5백 위안, 우리 돈으로 10만 원이 못됐습니다. 겁이 많고 몸이 유연하지 않다며 온갖 폭력을 행사하던 곡예단 단장은 어린 그녀를 어느날부턴가 곁에 두고 예뻐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음흉한 목적이 있었던 겁니다. 이를 눈치 챈 단장 부인은 그녀를 더욱 학대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녀는 쫓겨나듯 어딘가로 팔려갔습니다. 어느덧 10대 소녀가 되어 버린 그녀의 몸값은 많이 올라있었습니다.
찾는 가족도 없고 신분도 불분명한 그녀는 여기저기 매매춘업소부터 이런저런 작업장까지 인신매매업자들에겐 쓸모가 많았던 겁니다. 물론 그녀에게는 한 푼도 쥐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저런 고초를 겪으며 현대판 노예생활을 이어가던 그녀는 급기야 2009년에는 중국 서쪽 변방인 신장위구르 자치구로 팔려가는 신세가 됐습니다. 하루하루 지옥같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텼습니다.
언제가 자신의 칠흙같이 암담한 삶에도 환한 태양이 비칠 날이 올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간절했던 소망은 이뤄졌습니다. 2013년 신부감을 찾던 가난하지만 건실했던 신장의 노총각이 평생 모은 전 재산을 내고 그녀를 맞은 겁니다.
둘은 혼인했고 그녀는 두 딸을 낳아 기르며 평생 지울 수 없을 것 같았던 한과 슬픔을 조금씩 치유해가고 있습니다. 그녀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행복을 갖기까지 그녀는 무려 9번의 인신매매를 당했습니다.
중국이 감추고 싶어하는 어두운 그늘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신매매 천국’이라는 오명입니다. 공식적으로 집계된 인구만 14억에 육박하고,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영토를 가진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비문명의 극치인 인신매매가 성행했습니다. 그 역사를 되짚어 올라가는 건 현재 중국 땅에 언제부터 인간 사회가 형성되었느냐를 가늠하는 것과 같은 얘기일지도 모릅니다.
근세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봉건의 역사동안 노예제도는 공공연히 중국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시스템의 일부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전쟁포로만으로는 부족했던 만큼 힘없는 약자를 노예로 사고파는 추악한 거래는 오래전부터 이어져왔습니다.
아울러 남성 중심사회에서 빠지지 않는 유흥 문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수많은 창기(娼妓)를 공급할 수 있었던 것도 인신매매를 통해서였습니다. 공산혁명으로 신 중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인신매매는 좀처럼 근절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인신매매금지법이 제정된 1990년대 초 이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이나 여성들을 사고 파는 게 중국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묵인되어 왔습니다.
인신매매의 주된 희생자는 영유아와 여성입니다. 쉽게 납치할 수 있고 수요가 많은데다 시간이 갈수록 몸값이 높아진다는 이유에 사회에서 상대적 약자들이 재물이 되고 있는 겁니다.
매년 20만 명이 되는 영유아들이 중국 대륙에서 납치 혹은 육아포기를 통해 어디론가 은밀히 거래되고 있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중국 남부 윈난을 통해 각지에서 잡혀 온 수십만 명의 여성들이 미얀마, 태국, 라오스 등을 거쳐 전 세계 매춘시장으로 팔려나고 있다는 국제기구의 보고도 있었습니다.
국제사회의 문제제기가 잇따르자 중국 정부는 인신매매조직의 소탕을 공언하고 여러 차례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벌였습니다.
그때마다 조직원만 수 천 명에 이르는 전국망을 갖춘 ‘대병단’이나 수십 명이 점조직으로 활동하며 치고 빠지기식 비정기적 활동을 하는 ’유격대‘ 등 다양한 조직을 검거하고 이들의 마수 속에 학대 받아 온 인신매매 피해자들을 구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뿐이었습니다. 여기엔 크게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인신매매 범죄의 대상이 될 만한 신분 불명의 사람들이 중국 땅에 여전히 많기 때문입니다. 공식적으로 집계된 13~14억 명 외에도 호적에 등록되지 않은 ’헤이저(黑者)‘가 많게는 2억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1가구 1자녀 정책이 30여 년 간 강력히 시행되면서 호적에 오르지 못한 채 살아가는 무적자들이 여기에 포함돼 인신매매의 주된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첫번째 이유가 공급 측면이었다면 두번째 이유는 수요 측면입니다. 개혁개방 이후 급격한 경제 성장과 도시화를 겪은 중국은 농촌 지역의 상대적인 낙후가 더욱 심해졌습니다. 배우자와 자식의 소유를 작은 돈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농촌 지역에서는 지역 사회의 묵인하에 인신매매가 그 해결책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렇게라도 결혼 문제, 자녀 문제를 해결하도록 놔두지 않으면 더 크게 축적된 불만이 어떻게 폭발하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는 게 농촌 사회의 현실이고 중앙 정부 역시 당장 어쩌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세번째 이유로는 인신매매범들을 검거하고 추적할 전국적인 경찰망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중국의 경찰인 공안은 우리나라처럼 전국적인 조직이 아닙니다.
각 성시 별로 지방 정부 하부 조직으로 운영이 되다보니 한 마디로 관할 구역을 넘어서는 공조 수사가 그 만큼 어렵다는 얘깁니다.
성시 경계만 넘으면 추적을 따돌리고 숨어버리기가 용이합니다.
반면 인신매매조직은 전국적인 유통망을 갖추고 납치, 이동, 유통, 도망자 추적 등 역할까지 분담해 조직적으로 움직이다 보니 경찰에 쉽게 붙잡히지 않습니다.
앞서 소개해 드린 5살 때부터 9번이나 인신매매를 당했던 올해 25세의 여인은 이제 두 딸의 엄마가 됐습니다.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탓하며 자기를 버린 친부모와 자기를 물건 취급하며 착취했던 세상을 증오할 법도 하지만 그녀는 친 엄마를 애타게 찾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두 딸을 낳으면서 자신을 낳아준 친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가정에 대한 소중함이 그만큼 절실해졌던 모양입니다. 중국의 한 자원봉사단체의 도움을 받아 생모 찾기에 나선 그녀의 사연이 먹먹한 울림을 만들어내면서 다시금 부끄러운 자화상에 대한 중국 사회의 반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임상범 기자doongl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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