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9.19
오영환/도쿄특파원
2년간에 걸친 안보조약 개정은 유례가 없는 반정부, 반미 데모를 불렀다. 전쟁에 대한 알레르기와 A급 전범 출신인 기시에 대한 우려가 겹쳐졌다. 일본은 보혁(保革)으로 양분됐다. 중국을 찾은 아사누마 이네지로 사회당 서기장은 안보조약을 언급하면서 “미 제국주의는 일·중 인민의 공동의 적”이라고도 했다. 기시 정권은 우익단체와 폭력단까지 동원해 시위를 막았다. 기시는 시위가 수그러들지 않자 조약 비준서 교환을 끝내고 60년 6월 사직했다. 시위 규모는 한때 전국에서 560만 명에 달했다. 기시 퇴임 후 이른바 안보 소동은 잠잠해졌다. 시위는 반(反)기시 투쟁이기도 했다. 당시 아베 총리는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다. 기시는 시위대에 둘러싸인 자택에서 그들을 흉내 내 “안보 반대”를 외치던 아베를 보고 웃었다고 한다. (『아베 신조와 기시 노부스케』, 오시타 에이지)
아베의 안보법제는 기시의 미·일 안보조약 개정과 동전의 양면이다. 기시가 대등한 동맹의 밑그림을 그렸다면 아베는 행동계획을 짰다. 진정한 미·일 동맹의 문이 열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아베는 안보법제를 외조부의 조약 개정에 견준다. “그 당시 전쟁에 휘말린다고 비판받았지만 개정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고 했다. 아베 집무실에는 기시가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과 안보조약 개정에 서명한 사진도 걸려 있다고 한다.
안보법제로 일본 안보 체제와 방위력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됐다. 일본의 적극적 안보 공헌을 통한 쌍무적(雙務的) 미·일 동맹은 뒤집어보면 일본의 자립이기도 하다. 기시의 대미 자주와 협력의 이중주는 한 대(代)를 거쳐 손자한테서 재현됐다. 그새 일본 정치·사회는 확 바뀌었다. 60년 안보조약 개정안 비준 땐 자민당 거물인 고노 이치로 전 부총리와 미키 다케오 전 총리가 표결에 불참했다. 지금의 자민당엔 그런 다양한 스펙트럼이 없다. 아베를 축으로 한 강철대오다. 야당은 무력하고 시민사회의 영향력도 예전 같지 않다. 사회 전반이 보수화됐다. 우리는 지금 더욱 적극적으로 자기주장을 펴는 보통국가 일본을 마주하고 있다.
오영환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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