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國際·東北亞

[노트북을 열며] 김정은의 서조선, 시진핑의 동조선

바람아님 2015. 9. 18. 10:50
중앙일보 2015-9-17

북한말엔 파상적인 중국어의 세례를 입증하는 어휘가 적잖다.

 ‘괜찮다’는 뜻의 ‘일없다’는 중국어(沒事·일없다)에서 왔다. ‘돕는다’는 ‘방조(幇助)한다’, ‘대답한다’는 ‘답복(答復)한다’는 중국어를 차용한다. 본령(재능)·소질(자질) 등 우리말에는 다른 뜻이 있어 중국어를 배울 때 많이 헷갈리게 했던 단어를 북한에선 중국어와 같은 뜻으로 쓴다. 10년 전 베이징(北京) 외국어대 연수 시절 같은 반의 북한 외무성 소속 통역 요원은 기하급수적으로 중국어 어휘를 빨아들이곤 했다. “천재다, 천재”라며 엄지를 세워 주곤 했는데 북한말에 이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정용환</br>JTBC 정치부 차장
정용환</br>JTBC 정치부 차장

 엊그제 북한의 원자력연구원장 명의로 나온 발표 중 ‘각종 핵무기들의 질량적 수준을 끊임없이 높여…’라는 표현만 해도 그렇다. ‘질량적 수준’은 우리말로 질적 수준을 뜻한다. 중국어 차용이다.


 정치의 세계에서도 북·중 간에는 그들끼리 알아주는 시그널이 있다. 소련식 당국가체제인 북·중의 정치 시스템은 당이 정부를 이끄는 구조다. 2013년 7월 북한판 승전기념일 열병식에 정치국원인 리위안차오(李源潮) 국가 부주석이 참관했다. 앞서 2012년 11월엔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만류하기 위해 정치국원인 리젠궈(李建國) 전인대 부주석이 방북했지만 북한은 보란 듯이 미사일을 쏘아 올렸다. 중국 공산당의 핵심 의사결정 기구인 정치국 멤버는 시진핑(習近平) 주석, 리커창(李克强) 총리를 포함해 25명에 불과하다. 곧 있을 한·중 고위급 전략대화에서 김관진 청와대 안보실장의 파트너는 양제츠(楊潔<7BEA>) 외교담당 국무위원이다. 205명에 달하는 장관급 중앙위원 중 한 명이다. 정치국원과는 발언의 위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1·4후퇴 시대’를 접고 중국과 통일외교를 시작했다는 낭만적 판타지가 무성하지만 애증으로 점철된 북·중 관계를 ‘질량적으로’ 바꾸기엔 갈 길이 멀다. 지정학적으로 중국 스트레스를 안고 곡예하듯 살아온 북한이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카드를 동시에 꺼냈다. 전례가 드문 파격이다. 다음주 미·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좀 다녀가라’는 대중 메시지일 수도 있는 것이다.


 중국 인터넷에는 동조선(東朝鮮·북한 동부지역)·서조선(西朝鮮)이란 표현이 돌고 있다. ‘서조선엔 있는데 동조선엔 없는 것’을 묻는 허무개그 형식의 냉소와 야유들이다. 홍콩 언론에도 등장하곤 하는데 북한을 동서로 나눠보는 접근법이 생소하면서도 섬뜩했다. 북한 동부는 중국의 숙원인 동해 바다로 나가는 경제·안보적 관문이기 때문이다.


 항간에 떠돌던 한·미·중·러 4개국이 북한을 분할하자는 중국의 제안에서도 중국 몫으로 원산만에 눈독을 들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쯤 되면 중국이 무상으로 지원하는 중유와 식량이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대북 레버리지라는 프레임도 달리 보인다. 도광양회(韜光養晦·발톱을 감추고 실력 양성에 매진)가 끝날 때까지 북한 붕괴를 막는 시간 벌기 차원이라면, 등골이 오싹하지 않은가.


정용환 JTBC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