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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북한 정권의 체제관리 능력은 우리의 상상 이상” 19세기 이탈리아의 리소르지멘토, 통일 비전으로 제시

바람아님 2015. 11. 5. 00:43

[중앙일보] 입력 2015.11.04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02> 6·15 남북 정상회담
DJ 햇볕정책에도 북측 계속 도발
JP “북한은 분명한 적, 환상 버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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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2월 9일 동부전선 부대를 방문한 김종필(JP) 국무총리가 관측소에서 망원경으로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JP는 이 자리에서 “환상을 가지고 통일문제를 다루는 사람이 많지만 북한은 분명한 우리의 적”이 라고 강조했다. 김대중(DJ) 대통령이 취임 초부터 추진해 온 대북 햇볕정책을 경계하는 발언이었다. JP는 “DJ의 햇볕정책은 여러 부분에서 동의할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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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DJ)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대북정책에서 이솝 우화를 빗댄 이른바 ‘햇볕정책’을 추진했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것은 강풍의 힘이 아닌 태양의 따뜻함’이라면서 북한에 대해 화해와 포용의 정책과 제스처를 썼다. 1998년 6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 500마리를 트럭에 싣고 방북한 데 이어 쌀·비료·의약품·생필품을 실은 배가 북한을 향해 출항했다.

 나는 DJ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였다. 하지만 DJ의 햇볕정책은 여러 부분에서 나의 동의를 구한 적이 없고 또 동의할 수 없었다. 내가 지켜봐 온 북한의 공산체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변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니었다. 김영삼 정권 시절인 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도 일부에선 이북에서 수십만의 피란민이 내려오고 일본으로 갈 거라고 넘겨짚었지만 실제 북한체제는 별로 동요(動搖)하지 않았다. 식량 달라, 비료 달라고 북한이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고 해서 북한 정권의 명운(命運)이 다했다고 생각하는 건 오판이다. 북한 정권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체제 관리 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가 개혁·개방의 포용정책을 내놓으면 북한이 그것을 받아들여 변화하리라는 생각은 장밋빛 환상(幻想)에 가까웠다.

 나는 DJP 공동정권의 한 축이었다. 하지만 포용정책에 관한 한 밀어붙이기 기세 때문에 DJ 정권 내부 분위기는 다른 견해와 지적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간간이 충고의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98년 12월 동부전선 군부대를 방문했을 때 나는 포용정책에 대한 견제와 충고의 말을 던졌다. “동족이니까 얼마든지 통일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통일문제를 다루는 사람이 많다. 북한은 분명한 적(敵)인 만큼 그런 환상을 버려야 한다. 북한 인민군은 어떤 일도 서슴지 않고 저지를 군사력을 갖춘 집단이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평화를 사랑하니 북한도 그럴 것이라는 환상이나 관념을 버려야 한다.” 남측의 대북 포용정책이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도발이 이어지던 상황이었다. 북한은 잠수정과 무장간첩을 침투시키는가 하면 대포동 1호 미사일을 시험 발사하기도 했다. 급기야 99년 6월 서해에서 남북 간 군사교전이 벌어졌고 우리 해군의 승리로 끝났다(1차 연평해전). 그 속에서도 DJ 정부는 햇볕정책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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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회담 시작을 보도한 2000년 6월 14일자 본지 1면. 광고 없이 전면에 사진을 실었다.


 내가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인 2000년 3월 김대중 대통령은 독일 베를린자유대학 강연에서 이른바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다. 북한에 사회간접자본 확충을 포함한 대규모 경제 지원을 할 테니 남북 간 특사를 교환하자는 제안이었다. 햇볕정책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는 북한 측에 대화를 촉구하는 손짓을 한 것이었다. DJ가 남북 정상회담을 실현하고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해 대북정책을 너무 성급히 추진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과 의심이 야권에서 나왔다. 나 역시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마침 총선(4월 13일)을 얼마 앞두지 않은 터라 ‘신북풍(新北風)’ 논란이 일었다. DJ의 베를린 선언을 기점으로 정상회담을 위한 남북한 비밀 접촉은 급물살을 탔다. 4월 10일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이 6월 평양에서 열린다고 공식 발표했다. 총선을 사흘 앞둔 발표 타이밍이 미묘했다.

 남과 북 정상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한자리에 마주하는 것 자체가 역사적 전기(轉機)임엔 틀림없었다.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은 인민복 차림의 북한 김정일과 두 손을 마주 잡으며 감격스러워했다. 두 사람은 승용차 뒷자리에 나란히 올라타고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으로 이동했다. 두 차례의 단독회담 끝에 두 사람은 6월 14일 다섯 개 항으로 된 합의문에 서명했다. 6·15 남북 공동선언이었다. ‘남과 북은 통일문제를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간다’는 제1항과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 나간다’는 제2항이 핵심이었다. 나는 TV를 통해 정상회담의 진행을 죽 지켜봤다.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DJ와 6월 20일 청와대에서 부부 동반 만찬을 했다. 내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지 5개월여 만의 만남이었다. 남북 정상회담의 내용을 설명하고 조언을 구하기 위해 DJ가 초청한 자리였다. DJ가 반갑게 맞으며 “그동안 적조했습니다”라고 인사하기에 나는 “5개월 만에 뵙습니다. 이번에 큰일 하셨습니다”라고 화답했다. 이날 DJ는 평양 방문에서 있었던 일과 6·15 남북 공동선언 내용에 대해 내게 상세히 설명을 했다. 나는 “합의사항들이 잘돼서 민족의 앞길을 열어갔으면 좋겠습니다”고 덕담을 건넸다. 만찬 자리는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됐다.

 하지만 공동선언에서 명시한 연합제나 낮은 단계의 연방제 통일 방안은 나의 경험적인 통일관(觀), 비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로 다른 체제를 봉합하는 방식으로 통일이 된다면 그 이후 또 다른 문제를 초래할 가능성이 컸다. 후유증을 최소화하려면 딱 하나의 체제를 제시해 통일을 이뤄야만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었다.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방안은 19세기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이탈리아 부흥운동)의 이탈리아 통일이었다.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 장군은 남부 원정에 성공한 뒤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망설임 없이 사르데냐의 왕에게 바침으로써 통일을 이룩했다. 나는 DJ와의 만찬 직후에도 “남북 정상회담을 높이 평가하고 현실로 받아들인다. 다만 전향적이면서도 냉철하고 신중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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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 20일 청와대 만찬에 참석한 김종필자민련 명예총재(오른쪽)가 김대중 대통령 부부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통일이야말로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신중을 기해야 할 문제다. 환상과 아전인수(我田引水)격 사고로 덤벼들어서는 곤란하다. 북한 체제가 좀 더 풍화작용을 일으켜 변화하기를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통일이 돼서 북한 동포 2000만 명과 같이 살게 된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도 우리 국민은 소득 중 절반은 북쪽을 지원하는 데 써야 할 것이다. 과연 여기에 선뜻 찬성할 우리 국민이 얼마나 될 것인가. 통일을 위한 기금을 모으자는 운동은 과거에도 많았고 오늘에도 있지만 통일을 국민성금으로 연결 지으려는 것은 어림없는 생각이다. 통일, 통일 소리를 지르며 국민에게 뜬 희망을 심어주는 것은 진정한 애국이라 할 수 없다. 통일은 감성이 아닌 오성(悟性)으로 봐야 한다. 대통령이 임기 중에 무언가 이루겠다고 조급하게 굴어서 될 일도 아니다. 북쪽을 자꾸 자극하기보다는 세월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답을 꺼내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은 긴 세월이 필요할 듯하지만 가장 가깝고 확실한 방식이다. 우리가 통일을 위해 지금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이질화된 남북이 동질화하도록 꾸준히 접촉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상당 기간은 평화 공존의 시기를 보내면서 통일에 대비한 국력을 기르는 데 주력해야 한다. 독일이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서독이 동독을 끌어안을 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독 국민은 통일 이후 동독 재건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기에 통일된 조국을 맞이할 수 있었다.

 DJ는 6·15 정상회담으로 분단과 적대에 종지부를 찍고 통일에 다가갔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통미봉남(通美封南)을 바탕으로 핵무기 등 문제에선 미국만을 상대하려는 북한 정권으로서는 남북 관계가 하나의 수단일 뿐이었다. 우리 정부는 김정일의 답방을 다그쳤지만 결국 그는 오지 않았다. 그래도 DJ에게는 그의 정치 생애에서 뜻깊은 일이 있었다. 2000년 12월 그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것이다.

 내가 DJ와 단둘이 만났을 때 직접 들은 이야기가 있다. DJ는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김정일의 링컨 콘티넨털 차량 뒷좌석에 단둘이 타고 백화원 영빈관까지 이동했다. 차 안에서 김정일은 길가에 서서 붉은 꽃술을 흔드는 환영객을 가리키며 “저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여기 계신 동안 잘 모시겠습니다. 편안히 계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DJ는 김정일에게 “남북 국민과 세계가 관심을 갖는 회담에서 민족에 희망을 주는 결과가 있었으면 합니다”고 화답했다는 것이다.

 이런 대화 이외에 55분간 두 사람만의 동승에서 어떤 말이 오갔는지에 대해 많은 이가 궁금해했다. DJ는 내게 그 밖의 다른 민감한 대화 내용도 세심하게 소개했다.

 6·15 정상회담은 노벨평화상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DJ의 성취는 오랜 집념의 결실이었다. 6·15 회담 내용은 남북 공동 작품이지만 DJ는 혼자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북한을 용인하는 용공(容共)이 아닌 북한을 절묘하게 이용하는 DJ식 용공(用共)이었던 셈이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ng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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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소사전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1807~1882)=이탈리아의 국민적 영웅. 청년 이탈리아당부터 로마 공화당까지 여러 차례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투쟁에 나섰지만 실패하고 해외로 망명했다. 1860년 1000여 명의 의용군(붉은셔츠부대)을 이끌고 부르봉 왕가가 지배하던 시칠리아섬으로 진격, 2만 정규군을 물리치고 시칠리아를 점령했다. 이어 본토에 상륙해 나폴리에 입성했다. 공화주의자였지만 조국 통일을 위해 신념을 버리고 자신의 점령지 전체를 사르데냐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넘겨줘 통일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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