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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독서광 JP “일야일권 독파주의” 나폴레옹 전기가 5·16 상상력 자극

바람아님 2015. 11. 3. 00:32

“세월 아닌 이상 잃을 때 비로소 늙는다” JP '청춘' 번역해 양김 퇴출론 잠재워 … 소년 독서광 JP “일야일권 독파주의” 나폴레옹 전기가 5·16 상상력 자극

[중앙일보] 입력 2015.11.02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01> JP의 문학과 사자성어 
96년 YS계 ‘70세 정년론’ 퇴출 공세 
JP 은유·여백의 언어 앞에서 무기력 
역경 뛰어넘은 인간의 성취에 매료 

학창시절 위인전과 역사에 심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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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올해 90세로 젊은 시절과 마찬가지로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청구동 자택 2층 서재 는 일어·영어·한국어로 된 역사·위인전·문학책 등이 가득차 있다. 그는 “독서할 시간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라며 “매일 책을 읽지 않으면 그날 아무것도 안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 전 총리가 1971년 쓴 자신의 『JP칼럼』 초판본을 들고 읽고 있다. [김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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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렸을 적 마을과 학교에서 개구쟁이였지만 책벌레로도 소문났다. 감명 깊은 책의 문장이나 시구를 줄줄 외우고 다닐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부여공립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4~5학년 때부터 플루타르크 영웅전, 나폴레옹과 같은 위인들의 전기에 심취했다. 동서양 고전을 탐독하면서 거미줄같이 얽힌 운명적 조건과 활화산 같은 의지의 행동이 교직(交織)된 인간의 성취를 발견하곤 했다. 나의 독서벽(癖)은 난독(亂讀)에 속하지만 역사를 좋아했고 특히 인물의 전기(傳記)를 좋아했다. 역사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인물을 이해하는 게 역사를 잘 해명하는 첩경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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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JP) 전 총리의 1940년 공주중학교 시절의 모습. 가장 책을 많이 읽은 시기였다. [중앙포토]


 세인트헬레나 유배지에서 5년 반의 영어(囹圄) 생활 끝에 외로이 분사(憤死)한 불세출의 영웅 나폴레옹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10대 감상소년인 나를 사로잡았다. “나폴레옹은 이미 그 기능을 잃은 혀끝을 움직여 ‘프랑스, 군의 선두에서, 사랑하는 조세핀’이라고 절규했다”는 기록을 읽으면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위인·영웅들의 현란한 드라마를 더듬으며 감격과 선망(羨望)으로 잠 못 이룬 밤이 많았다.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쓴 회고록 등 저서는 30권이 넘지만 나는 한 페이지도 거르지 않고 다 읽었다. 공주중학교(현재 중·고교 통합과정) 3, 4학년 시절은 내 인생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은 때였다. 일본어로 된 이와나미(岩波) 문고판을 끼고 다니며 세계문학전집을 독파했다. 그때 ‘일야일권(一夜一卷) 독파주의(讀破主義)’란 말을 만들어 밤새 책을 읽고도 그걸 다 못 마치면 수업도 빼먹고 기숙사에 드러누워 마저 읽었다. 그게 소문이 나서 내가 아침에 안 보이면 야마가미(山上)라는 일본 담임 선생이 “종필이가 오늘도 책 한 권 다 못 읽었다고 고집을 부리는구나”하면서 교실에 나오라는 연락을 기숙사로 넣곤 했다. 그땐 책을 읽는 기쁨뿐 아니라 어린 마음에 으스대고 싶은 심정도 있었다. 밤에 기숙사 복도를 지날 때면 일부러 다 들으라고 일본어로 된 독일 시인 카를 부세의 시 ‘저 산 너머’의 한 구절 “야마노 아나타노 소라토오쿠 /사이와이 스무토 히토노유우…”(山のあなたの空遠く ‘幸’住むと 人のいふ: 산 너머 저쪽 하늘 멀리 행복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를 좍 외웠다. 다음 시구(詩句)인 “아아 나 또한 남을 따라 찾아갔건만 눈물만 머금고 돌아왔다네”를 일본말로 큰 소리로 떠들면 다들 날 쳐다보면서 “쟤가 누구냐”고 수런거렸다. 그때 외운 시구들은 지금도 한 자 빼놓지 않고 입에 붙게 낭송할 수 있다. 영국 바이런의 시도 내 가슴을 흔들었다. 그는 35세에 조국을 떠나 희랍(希臘·그리스) 독립 혁명군에 가담하다 병사(病死)했다. 이 때문에 진정한 애국자이면서도 조국에서 배신자란 소리를 들어야 했다. 바이런은 “그 마음의 상처를 너희, 조국이 내게 주었다”고 절규하며 죽었다. 학창시절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외우고 다닌 명시들 가운데 하나다. 그 시절 내가 접한 세계문학전집과 위인전 등은 대부분 일본어 책이었다. 일제 치하이기도 했지만 한글로 쓰인 제대로 된 서적을 찾기 어려웠다. 해방 이후 나온 한글 번역본들은 대부분 일본어 번역을 다시 번역한 중역(重譯)이었다. 글맛도 글맛이지만 오역(誤譯)이 많았다.

내 나이 이제 90이다. 지금도 매일 새벽 3시쯤 일어나서 한바탕 책을 읽고 다시 잔다. 요새는 새로운 책을 읽기보다 그 전에 읽었던 것을 되풀이해서 많이 읽는다. 사람들이 독서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다. 밤중에도 두서너 시간 읽으면 된다. 나는 매일 책을 읽지 않으면 그날 아무것도 안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감수성 풍부한 10대 성장기 때 섭취한 지식과 교훈, 충격과 감명은 내 일생을 연면(連綿)히 좌우했다. 20대 6·25 전쟁에서 발휘된 용기와 정밀한 사고, 30대 나이로 일으킨 5·16혁명의 열정과 상상력, 이후 정치적 고비마다 난국(難局)을 헤쳐나가면서 떠오른 영감과 지혜들은 그 시절 독서로 열고 다져진 내 정신세계에 차곡차곡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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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런( Byron) 영국 낭만주의 시인

(1788~1824)


 나는 대화할 때 직설(直說)과 단도직입(單刀直入)을 좋아하지 않는다. 은유나 시구를 인용한 비유로 나의 생각을 표현하곤 한다. 시구는 언어의 압축이며 비유는 상상을 부른다. 직설적인 말은 표현 그 자체에 갇혀 버리지만 시를 통한 함축적인 표현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훨씬 풍부하고 호소력 있게 전달한다.

 1996년 4월 총선은 나와 김영삼(YS)·김대중(DJ)이 부딪친 3김 정치의 연출 무대이기도 했다. 신한국당 총재였던 김영삼 대통령은 정치판에서 김대중 총재와 나를 퇴출시키려 했다. 집권 신한국당의 핵심인 YS 직계(민주계)는 70세가 조금 넘었던 나와 DJ를 과녁에 놓고 세대교체론 화살을 마구 쏘았다. ‘정치인 70세 정년론’까지 퍼뜨렸다. 나는 연령을 들어 압박하는 YS계의 강경파를 한심하게 여겼고 분노했다. 그러나 직설적으로 대적하지 않았다. 대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도쿄 사무실에 걸어놓고 암송했다는 미국 시인 새뮤얼 울먼의 ‘청춘(Youth)’을 번역해 96년 신년행사 때부터 정치권에 나눠주었다.

 나의 번역시 일부를 소개해 보겠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Youth is not a time of life; it is a state of mind)/…/세월을 거듭하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잃을 때 비로소 늙게 된다(Nobody grows old merely by a number of years. We grow old by deserting our ideals.)/세월은 흐르면서 피부에 주름살을 남기지만, 정열을 잃으면 정신이 시든다(Years may wrinkle the skin, but to give up enthusiasm wrinkles the soul)….” 마지막을 직역하면 ‘영혼에 주름이 진다’라고 해야겠지만 나는 ‘정신이 시든다’라고 번역했다. 청춘을 좌우하는 힘의 원천을 표현하는 데는 의지가 담겨야 하는데 이 점에서 영혼보다 정신이 더 적절한 언어라고 판단했다. 일단 정신이란 주어가 선택되면 동적이고 시각적인 ‘시든다’는 시어가 짝 달라붙는다. 인생의 가치를 나이의 숫자로 따지려는 자연 연령적 사고방식이 JP의 번역시 앞에서 초라해졌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YS 직계의 양김 퇴출 의도는 좌절됐다. 나는 경험적으로 시와 번역, 은유와 여백이 정치세계의 일상적인 직격(直擊)으로 밀어붙이기보다 위력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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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 시절인 1951년 8월 김종필 대위와 부인 박영옥 여사. JP는 브라우닝의 시로 프러포즈를 했다.


 올해 초 세상을 뜬 아내 박영옥과 인연을 맺어준 것도 시였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50년 9월 부산으로 피란 가 있던 아내에게 프러포즈할 때 영국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한 마디만 더(One Word more)’를 인용했다. 시의 한 구절인 ‘한 번, 단 한 번, 단 한 사람을 위해서(Once, only once and for one only)-鍾泌’을 적어 쪽지를 건넸다. 시를 읽고 얼굴이 발그레해졌던 아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사랑한다’는 표현보다 한결 낭만적이고 호소력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65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지난 추석을 앞두고 고향 부여를 찾았을 때 나는 아내의 무덤 앞에 이 시 구절을 적은 흰색 꽃 소국(小菊) 화분을 두고 왔다.

 내가 매년 정초에 즐겨 쓴 신년휘호를 비롯한 한자성어(漢字成語)는 어릴 적부터 읽고 배운 동양고전 덕분이다. 일곱 살 때부터 선친의 친구인 한학자 윤응구 선생에게서 『천자문』으로 시작해 사서삼경을 익히고 붓글씨를 배웠다. 학교를 마치면 곧바로 서당에 가서 한문을 익히는 것이 그 시절의 일과였다. 내 인생 평생의 가르침이 된 『동몽선습』 『논어해설』 등도 10대 때 다 뗐다. 『논어해설』은 성인이 되고 정치인이 된 뒤에도 수시로 꺼내어 되풀이하며 읽어보고 있다. 『논어』는 고전인데도 기묘하리만큼 현대성을 지니고 있다. 공자가 2500년 전에 보여준 양식이 현대의 우리에게 있어서도 지녀야 할 식견을 무수히 짚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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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5월 8일 JP(왼쪽)가 홍성유 한국소설가협회장과 회원들을 총리공관으로 초청, 오찬을 했다.


 한자성어는 나의 성찰 도구이면서, 한편으론 나를 드러내는 수단이기도 하다. 새해 한 해를 구상할 때는 물론 괴로울 때도 즐거울 때도 붓을 들었다. 묵묵히 한 자 한 자 옮겨 적다 보면 또 다른 나에게 도달하는 느낌을 받는다. 붓끝에서 한 자씩 모습을 드러내는 사자성어(四字成語)는 내면에서 나오는 어떤 힘을 일깨워준다. 물론 화선지 위에 붓이 움직일 때마다 묵향(墨香)과 함께 검은 먹이 배어나는 멋은 느낄 줄 아는 사람만이 느끼는 즐거움일 것이다.

 노자의 ‘상선여수(上善如水)’는 나의 인생 좌우명이자 정치철학이 담긴 사자성어다.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으며 물 흐르듯 순리에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30대 혁명의 시기에 나는 불꽃 같은 삶을 살았지만 40대가 넘어 정치와 행정에 집중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물의 지혜에 의탁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조반역리(造反逆理·기존 질서를 뒤엎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는 2001년 새해가 시작되기 직전 나의 격한 심정을 담아 쓴 휘호다. 99년 내각제 추진을 포기한 이후 2000년 4월 총선에서 자민련 의석수가 17석으로 줄어들어 당은 생존을 모색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때였다. 일찌감치 탈당한 김용환 수석부총재에 이어 강창희 부총재가 반기를 들었다. 나는 이 휘호로 당내 이탈세력에 대해 경고를 보냈다. 조반역리는 내가 만든 말이다. 중국 문화혁명 때 홍위병을 흥분시키고 선동한 사자성어가 ‘조반유리(造反有理·기존 질서를 뒤엎는 데는 나름대로 정당한 도리와 이유가 있다)’였다. 모택동(毛澤東·마오쩌둥)이 배후에서 10대 홍위병 을 부추겨 권력의 반대세력을 치기 위해 쓴 말인데, 내가 ‘유(有)’ 를 ‘역(逆)’으로 바꾼 것이다. 2000년 4월 총선 때는 시민세력을 자처하며 선거판을 어지럽힌 ‘낙천낙선운동’을 빗대 조반유리라는 말을 썼다. 낙천운동 배후 한쪽엔 DJ의 새천년민주당이 있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게 입장에 따라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제공한 나의 정치 수사(修辭)였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사진=김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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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소사전 새뮤얼 울먼(Samuel Ullman·1840~1924)=미국 시인. 태평양전쟁 후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울먼의 시 ‘청춘(Youth)’을 애송한 덕분에 미국보다 일본에서 더 잘 알려져 있다. 맥아더는 도쿄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 벽에 ‘청춘’을 액자에 넣어 걸어두고 늘 읽었으며, 여러 연설에서도 단골소재로 인용했다. 울먼은 유대계 독일인이었지만 11세 때 유대인 박해를 피해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했다. 앨라배마주 버밍햄의 시의원으로 활동하면서 흑인 청소년 교육을 위해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