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전폭기 격추로 러시아와 터키 관계가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터키가 러시아 전폭기 격추를 두고 두고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고, 터키는 “영공 침범이 또 일어나도 똑같이 대응(격추)시키겠다.”고 맞불을 놓고 있습니다. 급기야 러시아의 각종 경제 제재 조치에 이어 ‘터키와 IS의 원유 밀거래’ 의혹으로 사태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터키가 도대체 악연을 가졌길래 관계가 이 지경까지 악화됐는지, 또 원래 관계는 어떤지, 그리고, 지금의 상태가 어떻게 전개될 지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 '차르' 대 '술탄 질긴 악연
러시아와 터키는 18~19세기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습니다. 주된 무대가 ‘크림 반도’입니다. 크림반도는 최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태가 촉발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크림반도를 차지하는 건 흑해를 가지는 겁니다. 흑해는 오른쪽으로 러시아, 아래쪽으로 터키와 접해 있습니다.
이슬람교의 술탄으로 대변되는 오스만왕국의 북상 정책과 동방정교회의 차르가 지배하는 슬라브 왕조의 남하 정책이 늘 흑해의 쟁탈권을 놓고 충돌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임진왜란으로 뒤틀어졌듯이 러시아와 터키도 이런 악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의 동서 냉전시대에는 미국 등 서방은 구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 NATO를 창설합니다. 나토엔 터키도 가입했습니다. 터키는 구 소련이 흑해에 진출하는 걸 견제하는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터키는 수니파국가입니다. 그리고 친미 국가입니다. 시아파인 시리아 알 아사드 정권과는 척을 진 사이입니다. 그런데, 러시아가 미국과 서방이 축출대상으로 삼은 시리아 정부를 돕겠다며 내전에 개입했으니 얼마나 못마땅한 마음이겠습니까?
● 미워도 다시 한번…경제적 동반자
그래도 터키와 러시아는 경제적으로는 동반자 관계였습니다. 터키에게 러시아는 독일 다음으로 가는 교역국입니다. 관광분야에서도 러시아는 큰 손입니다. 터키를 찾는 러시아 관광객은 독일 다음으로 많습니다. 두 나라의 연간 교역량은 300억 달러입니다. 터키는 2020년까지 러시아와 무역규모를 1000억 달러까지 확대할 계획도 가졌습니다.
특히 에너지 분야에서는 절대적 협력 관계입니다. 터키는 러시아의 천연가스를 독일 다음으로 많이 수입하는 나라입니다. 더구나 러시아는 터키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천연가스 수송관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러시아는 터키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 계약도 맺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국제무대에서 거진 왕따 수준인 러시아에게 터키는 몇 안 되는 경제적 친구인 셈입니다.
● 한계가 보이는 경제 제재
러시아는 전폭기 격추 이후 터키가 사과를 하지 않는다며 각종 제재를 단행했습니다. 자국민의 터키 여행 금지, 자국내 터키인의 근로계약 연장과 신규 고용 금지, 터키 농산물 수입 중단 등 입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비열한 군사범죄를 저지르고도 토마토와 건설 분야 제한으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라고 더 길고 더 강도 높은 보복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번 제재로 터키는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겁니다.
그런데, 러시아는 괜찮을까요? 양은 다를지 몰라도 러시아도 똑같이 코피를 흘릴 겁니다. 요즘 러시아 경제 상황이 어떤가요? OPEC의 ‘미친’것 같은 저유가 정책에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서방의 제재로 경제지표는 곤두박질 치고 있습니다.
올해 러시아의 국내총생산은 전년대비 -3.8%가 예상되고 내년도 마이너스 성장이 전망됩니다. 물론, 푸틴의 지지율은 경제악화에도 90%를 육박하지만 국민적 지지만 믿고 한도 끝도 없는 관계 단절을 고집할 수만은 없을 겁니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북한군 장교가 마을 촌장에게 묻죠. “인민들이 어떻게 저리도 잘 따르느냐?” 촌장은 답은 간단했습니다. “잘 먹여야지.” 푸틴도 잘 알겠죠.
● 러시아인 줄 알고 격추시켰나?
러시아 전폭기가 정말 터키 영공을 침범했는지, 터키가 사전에 경고 통신을 계속 보냈는지, 러시아 전폭기인 줄 모르고 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제 추측으로는 영공을 침범한 건 맞는 것 같고, 러시아 전폭기인 줄 뻔히 알고 쐈을 것 같습니다.
터키는 러시아가 IS를 공습한다면서 자신들이 지원하는 투르멘족 반군까지 공습한다고 비난해왔습니다. 러시아가 최소 2차례 터키 영공을 침범해 강력하게 경고를 해왔습니다. 그런 점 참에 러시아 전폭기가 영공으로 다가서자 전투기가 뒤따라가서 작정하고 격추시켰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터키 말대로 초음속으로 러시아 전폭기를 터키 영공에 머문 17초(터키의 주장)라는 짧은 시간 안에 격추를 시켰다면 이건 미사일을 쏘려고 이미 작정한 게 아니냐는 분석입니다. 일부는 터키 영공을 벗어난 상황에서 격추됐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벨기에의 지오반니 라펜타라는 천체물리학 교수는 추락 장소 등에 근거해 계산을 하면 피격 전에 전투기는 시속 980km로 비행했고, 이 속도로 터키가 침범했다고 주장하는 2km의 영토를 지나가는 데는 불과 7초라는 겁니다. 17초동안 영공에 머물렀다는 터키의 주장은 수치상 잘못됐다는 거죠.
일부는 터키가 러시아와 경제적 우호를 다져가는 과정인데도 러시아 전폭기인줄 알고도 격추시킬 가능성은 적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격추 당시 터키 정부는 시리아 정부의 러시아제 전폭기로 오인하고 격추했을 것이란 주장도 제기합니다.
● 진실공방 2라운드 'IS 원유 밀매'
양국의 갈등은 ‘IS와 원유 밀매’라는 새로운 진실공방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IS산 원유의 최대 소비자로 터키를 지목하고 있습니다.
터키가 IS로부터 석유 공급선을 지키려고 최근 IS의 원유시설을 집중 폭격하는 러시아를 겨냥해 전폭기를 격추시켰다는 겁니다.
러시아 국방부는 수십 대의 유조차량이 시리아에서 터키 국경을 통과하는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터키가 IS와 원유를 밀거래하는 증거라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에 터키와 IS의 밀거래 경로 3개를 자세히 그린 지도까지 공개했습니다. IS와 밀거래 배후에는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 그 가족, 그리고 터키의 지도부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에르도안의 아들이 거대한 석유회사를 운영하고, 또 터키 에너지 장관에 선임돼서 대놓고 범죄행위를 저지른다고 비난했습니다.
터키는 당연히 발끈하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옛 소련의 공산당 기관지처럼 거짓말로 선동을 하고있다며 음해라고 반박합니다.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터키 정부와 IS가 원유를 밀거래하는 증거를 제시하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까지 공언했습니다.
오히려 ‘러시아와 시리아 알 아사드 정권이 IS와 원유를 밀거래한다’고 역공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러시아가 IS와 석유를 사고판 증거가 있다며 이를 곧 공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 진실을 꼭 알아야 할까?
일단 터키가 IS산 원유의 밀거래 경로라는 건 맞는 말 같습니다. 하지만, 터키 정부가 여기에 관여하고 있는 지는 아직 누구도 납득할만한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IS 지배지역에 항구가 없습니다. IS가 원유를 내다팔려고 하면 육로를 거칠 수 밖에 없습니다. IS와 국경을 접한 터키 뿐 아니라 이라크 쿠르드자치정부가 늘 용의선상에 올라있습니다.
아랍뉴스 매체인 알아라비 알자디드는 IS산 원유가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에서 기초 정제 작업을 거쳐 쿠르드 산으로 둔갑한 뒤터키 국경을 넘어간다고 보도했습니다.
터키 동남부 국경지대엔 그리스와 이스라엘 이중 국적을 가진 ‘파리드 삼촌’이란 중개업자가 IS산 원유를 터키 서남부의 항구로 운반한 뒤 이스라엘의 아슈도드 항으로 수입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수입하는 원유의 75%가 이라크 쿠르드자치정부 산으로 돼 있는데 적지 않은 양이 IS산 원유라는 겁니다.
사실 터키 정부도 터키가 IS산 원유의 밀거래 경로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시리아에서 넘어오는 원유 7천 9백만 리터를 압수했다고 밝힌 점이 그렇습니다. 그럴지언정 터키의 범죄조직이 이득을 봤을 수 있어도 터키 정부가 밀거래의 배후라는 걸 주장할 근거는 되지 못합니다.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오히려 러시아와 시리아 알 아사드 정권이 IS산 원유 밀거래의 주범이라고 반박합니다. 러시아와 시리아 이중국적자인 조지 하스와니라는 중개업자가 IS와 시리아 정부간 밀거래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미국 재무부가 밝혔습니다.
하스와니는 IS의 점령지에서 에너지 생산설비 업체를 운영 중입니다. 시리아 알 아사드 정권에겐 IS보다는 반군이 더 위협적인 존재입니다. 당장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적의 적과 동지가 되는 선택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IS는 하루 4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해 시세의 절반인 20달러에 밀매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렇게 하루 150만달러, 연간 5억 달러를 벌어들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돈 가운데 해외 수입은 비중이 얼마나 될까요?
IS가 시리아의 1/2, 이라크의 1/3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3배 크기입니다. 그 넓은 점령지에서 관리하는 주민만 8백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주민들에 필요한 석유는 어떻게 지급하고, 더구나 전장에서 트럭과 탱크를 굴리기 위해선 석유가 필요한 데 그건 다 어디서 구할까요?
전문가들은 IS가 생산하는 석유의 상당량은 점령지에서 소모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해외 판매량의 비중은 그리 많지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물론 점령지 주민한테 팔아서 거둬들이는 돈도 똑 같은 돈이지만) 이런 점에서 우리가 우려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원유가 해외로 불법적으로 흘러간다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나름 합리적인 추론입니다.
하지만, IS의 목숨을 죄려면 돈줄의 씨를 말려야 하고 그러려면 원유를 손에 넣지 못하게 해야하는 건 자명한 사실입니다. 더구나 누구든지 앞에선 IS의 격퇴를 외치면서 뒤로는 IS와 검은 거래로 뱃속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경우 당사국뿐 아니라 모처럼 힘을 모으고 있는 국제사회의 반 IS동맹은 치명타를 입게 될 겁니다.
러시아와 터키가 앙금을 품고 서로를 할퀴고 헐뜯는 거야 어찌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지금의 IS와 원유 밀거래 의혹이 러시아든 터키든 누군가 정말 그랬다는 게 사실로 밝혀질 경우 닥쳐온 파장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처 내고 싶은 상대지만 공공의 적과 맞서기 위해선 필요한 상대라면 어느 정도 선에선 스스로 멈춰야 합니다.
자칫 이전투구에 IS만 웃게 해주는 꼴이 될 지도 모릅니다. 진실을 꼭 밝혀내야만 세상이 긍정적으로 돌아가는 건 만은 아닙니다.
정규진 기자soccer@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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