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5.07.03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오늘날 한국인들이 떠올리는 임진왜란의 영웅이라고 하면 이순신, 권율, 김시민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에 따라, 시대에 따라 누구를 전쟁 영웅으로 생각하는지는 서로 다르다.
앞서 거론한 세 명이 임진왜란의 영웅으로 확립된 데에는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이들의 행적을
앞서 거론한 세 명이 임진왜란의 영웅으로 확립된 데에는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이들의 행적을
대서특필한 것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징비록'은 이미 17세기부터 조선 내에서 널리 읽혔고,
18세기에는 일본으로, 19세기 말에는 중국 청나라로 건너갔다.
이에 따라 '징비록'의 임진왜란관은 이들 세 나라에서 공유하는 것이 되었다.
물론 이순신은 당파와 국가를 초월하는 전쟁 영웅이지만, 류성룡의 '징비록'이 일본과 청나라에 전해지기 전까지는
두 나라에서 오늘날과 같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순신을 오늘날과 같이 세계사적 전쟁 영웅으로 부각시킨 것은 류성룡의 '징비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징비록'만큼 널리 읽히는 임진왜란 문헌을 류성룡이 속한 남인 계열이 아닌 북인이나 서인 계열에서 남겼다면,
한국인들은 임진왜란을 이야기하면서 조헌이나 정인홍의 이름을 좀 더 자주 이야기하게 되었을 것이고, 원균도 지금과는
조금 다른 평가를 받게 되었을 터다.
그런데 '징비록'의 류성룡 자필본과 16권본ㆍ2권본 간행본을 비교하면 흥미로운 현상이 확인된다.
그런데 '징비록'의 류성룡 자필본과 16권본ㆍ2권본 간행본을 비교하면 흥미로운 현상이 확인된다.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류성룡 자필본인 '초본(草本) 징비록'에는 1592년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승리한
사실만 실려 있고 김시민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 '징비록'의 집필을 시작한 류성룡은 아마도 자필본을
작성할 당시까지 김시민이 제1차 진주성 전투를 지휘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것 같다. 자필본에 바탕해서 출판된
최초의 간행본인 16권본 '징비록'에는 김시민이라는 이름의 한자가 '金始敏'으로 되어 있다. 16권본 뒤에 간행된 2권본
징비록에서 비로소 '金時敏'이라는 올바른 이름이 적히게 된다. 임진왜란 초기에 일어났던 진주성 전투의 승리와 김시민의
장렬한 전사에 대한 정보가 중앙 정부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가, 1600년대 전반에 들어서야 그 정보가 서서히 조선 사회
내에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김시민은 임진강 방어전에서 승리한 신각, 선제 공격을 벌이다가
장렬히 전사한 유극량 등과 함께 암울했던 임진왜란 초기에 귀중한 승리를 거둔 전쟁 영웅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더불어 논개라는 여성도 진주성 전투와 관련된 인물로서 조선시대 후기에 부각되었다.
▲ 1593년 6월의 제2차 진주성 전투. 이 전투를 이끌다가 전사한 서예원을, 일본측에서는 제1차 진주성 전투의 김시민으로 오해했다. “에혼 다이코기” 6편 권10. 김시덕 소장. |
여담이지만,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이 지휘한 조선군에 일본군이 패한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는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명나라에서 파견된 심유경과의 강화 협상을 시작할 때에도, 히데요시는 진주성만큼은 무조건
함락시키라고 명했다. 그리하여 1593년 6월에 전개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쟁을 지휘하던 서예원이 전사하자,
일본측에서는 이 서예원이 제1차 전투를 지휘한 김시민과 동일 인물이라고 판단하여 패배에 대한 복수를 거둔 것이라며
만족스러워했다.
이처럼 김시민은 분명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고, 그에 대한 기억은 한일 양국에 깊이 각인되었다.
이처럼 김시민은 분명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고, 그에 대한 기억은 한일 양국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현상이 한 가지 확인된다.
오늘날의 한국에서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진주성 전투의 영웅 김시민, 그리고 장렬한 죽음으로 기억되는
진주 기생 논개의 명성이, 북한에서는 남한만큼 높지 않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김시민과 논개 대신 임진왜란의 영웅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평양성 전투를 이끈 김응서 장군과, 일본 장군을
죽였다는 전설의 주인공인 기생 계월향이다. 북한의 민속촌이라 할 평양민속공원에는 김응서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고,
계월향의 사당도 19세기에 모란봉 기슭에 세워져 평양 기생들이 이 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처럼 김응서가 북한에서 전쟁 영웅으로 기억되는 것은, 김응서가 평안도 용강에서 태어났고 평양성 전투에서 활약한데
힘입은 바 크다. 김일성도 한때 김응서를 자신의 조상이라고 주장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북한 사회에서 김응서의 지명도는
높다('북한개혁방송' 2008년 3월 23일 방송).
또한 계월향은, 전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 안에서 소서비(小西飛)라는 일본 장군을 접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계월향은, 전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 안에서 소서비(小西飛)라는 일본 장군을 접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계월향은 김응서를 끌어들여 소서비를 죽이게 했으나, 김응서는 탈출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계월향을 죽였다.
임진왜란 당시 소서비라고 불린 것은 나이토 조안(內藤如安)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훗날 카톨릭 신앙을 지키다가
마닐라로 추방되어 그 곳에서 죽었기 때문에 계월향 전설과는 맞지 않는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의 동생 고니시 루이스(小西ルイス)가 1592년 6월 평양성에서 전사했다는 기록이 루이스 프로이스
(Luis Frois)의 '일본사(Historia de Iapam)'에 보이지만, 그의 죽음에 김응서와 계월향이 간여했다는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이처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비극의 주인공 계월향의 이야기는 평안도 지역에서 널리 알려졌으며, 근대 이후에
▲ 필리핀 마닐라의 고니시 조안 기념 십자가. wikicommons |
아무튼 이처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비극의 주인공 계월향의 이야기는 평안도 지역에서 널리 알려졌으며, 근대 이후에
비로소 표준영정이 제작되는 김시민ㆍ논개와 달리, 김응서와 계월향의 초상화는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이 모두 현존한다.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에까지 전해져 저명한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김장군(金將軍)'이라는 단편소설을 집필하기도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에까지 전해져 저명한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김장군(金將軍)'이라는 단편소설을 집필하기도
했다. 남한에서는 임권택 감독이 1977년에 '임진왜란과 계월향'이라는 영화를 찍었고, 북한에서는 1995년에 유명 배우
리금숙이 출연한 영화 '김응서와 계월향', 2010년에 북한판 '대장금'이라는 평가를 받은 드라마 '계월향' 등이 제작되었다.
이처럼 김응서가 남북한에서 전혀 다른 평가를 받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그가 조선시대에 차별받던 평안도
이처럼 김응서가 남북한에서 전혀 다른 평가를 받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그가 조선시대에 차별받던 평안도
지역 출신이라는 점이다. 김응서의 문집은 그의 사후 100여년이 지난 뒤 평양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두 번째로, 김응서는 임진왜란 당시 최전방에서 일본군과의 교섭을 담당했으며 투항한 일본 장병들을 잘 지휘했는데,
두 번째로, 김응서는 임진왜란 당시 최전방에서 일본군과의 교섭을 담당했으며 투항한 일본 장병들을 잘 지휘했는데,
그 과정에서 조선과 명나라 조정의 적지 않은 오해를 산 것 같다. 명나라와 일본이 조선을 배제하고 강화 협상을 진행중이던
1593~96년 사이에, 조선에서는 김응서와 사명대사를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에게 보내 독자적인 강화 협상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김응서가 협상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존칭을 쓴 것을 조선 국왕 선조가 문제삼은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보인다.
“경상 우병사 김응서는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 못하겠으나 경망하고 무식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지난번에도 조정의 옳지 못한
“경상 우병사 김응서는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 못하겠으나 경망하고 무식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지난번에도 조정의 옳지 못한
주장에 발맞추어 국가의 큰 원수를 잊고 감히 적장과 사사로이 서로 만났다 하니, 그의 무도함이 심하다. 그런데 지금 또다시
사사로이 적장과 편지를 통하면서 심지어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대인(大人)이라고 존칭하기까지 하였다 하니, 심히 경악할
일이다. 이것은 적에게 항복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 그를 압송해서 추국할 것을 의논하여 아뢰도록 비변사에 말하라”
('선조실록' 선조28년 1595년 5월 1일).
실제로 1594년 11월 11일에 열린 김응서와 고니시 간의 회담 장면을 보면, 선조가 문제삼은 대목이 확인된다.
실제로 1594년 11월 11일에 열린 김응서와 고니시 간의 회담 장면을 보면, 선조가 문제삼은 대목이 확인된다.
당시 상황을 김응서의 문집인 '김장군유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11월에 김응서가 적장 등과 더불어 함안의 곡현에서
회견하기를 약속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등이 요시라(要時羅)를 응서에게 보내어 함안에서 회합하여 강화
맺기를 요청하니 응서가 원수부에 보고하고 도원수 권율은 조정에 계문했으며 조정에서는 응서로 하여금 적장들과 회견하여
적정을 탐지하게 하였다. 11일 응서가 백여기를 이끌고 먼저 당도한즉 유키나가가 사람을 보내어 문후하였다.
(중략) 겐소 등이 먼저 말하기를 ”성화(聲華)는 익숙히 들었으며 매양 한 번 뵈옵기를 원하였는데 오늘 외람히 장하(帳下)에
참여(參與)하오니 황송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병사가 대답하기를 ”대인 등이 옛날 우리나라에 내조하였으나 내가 마침
북방에서 직무를 띠고 있었으므로 만나지 못했는데 이제 만나보게 되니 다행한 일입니다.“”('양의공 김경서 장군 유사록' 84쪽).
이와 같은 대화가 오간 뒤에 시작된 강화 회담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일본이 원하는 것은 명나라에 조공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은 대화가 오간 뒤에 시작된 강화 회담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일본이 원하는 것은 명나라에 조공하는 것이므로
조선이 중간에 주선을 해주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말했고, 김응서는 조공을 원하면 명나라에 직접 가면 되지 왜 조선을
침략했느냐며 받아친다. 임진왜란 내내 조선과 일본 사이에 열린 강화 회담에서는 번번히 이러한 대화가 오고갔으며,
언제나 어떤 결과도 얻지 못하고 헛되이 끝났다.
한중일의 임진왜란 관련 기록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김응서가 '선조실록'에 보이는 것처럼 고니시 유키나가와의 회담에서
한중일의 임진왜란 관련 기록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김응서가 '선조실록'에 보이는 것처럼 고니시 유키나가와의 회담에서
매국 행위를 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협상의 상대방인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해 정중한 태도를 취했음은 인정된다.
현재 규슈 사가현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다이초인 절 문서(泰長院文書)' 가운데에는 고니시와 김응서 간에 오고간 편지가
포함되어 있다. 김응서가 고니시에게 보낸 편지는 정중한 어조로 적혀 있지만 '대인'이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는다.
고니시가 김응서에게 보낸 편지에는 '대인'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고니시 유키나가 기초 자료집' 77-78쪽).
두 사람 간에 오고간 편지는 어디까지나 외교 협상을 위한 것으로,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상대에 대해 어느 정도 예의를
두 사람 간에 오고간 편지는 어디까지나 외교 협상을 위한 것으로,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상대에 대해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추는 것은 아무리 전쟁중이라도 당연히 취해야 하는 외교적 행위였다. 협상 실무자가 아닌 사람들이, 협상의 내용이 아닌
몇몇 문구를 가지고 협상 당사자를 정치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비열하다. 최소한, 전쟁 초기에 수도와 백성을 버리고 망명까지
생각하던 선조가, 이런 것을 빌미삼아 최전방에서 목숨걸고 싸우는 장군을 비난한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행동이 아닐까.
다만, 김응서가 일본측과의 협상에 임하고 항왜(降倭)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행동은 명나라 측에도 불신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다만, 김응서가 일본측과의 협상에 임하고 항왜(降倭)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행동은 명나라 측에도 불신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직후에 명나라에서 집필된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에는, 이순신이 처벌받은 뒤에 조선 수군을 통괄하게 된
원균이 명나라 군대와 협력하여 일본군을 협공하려 했는데 김응서가 이 정보를 일본측에 흘리는 바람에 실패했다는 대목이
보인다. “조선 수영 장관인 원균은 한산에 있었는데, 비밀히 거병할 것을 계획하고 명군과 합류하여 부산의 일본군 소굴을
치려했다. 김응서는 의령의 육로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허장성세를 부리다가 원균이 중국과 약속하여 일본군의 소굴을
칠 날짜를 본의 아니게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흘렸다”('양조평양록' 권4하).
또한, 이순신이 투옥되고 원균이 부상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 것 역시 김응서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김응서와의 협상
또한, 이순신이 투옥되고 원균이 부상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 것 역시 김응서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김응서와의 협상
과정에서 요시라(要時羅)라는 일본인을 빈번히 왕래시켰다. 명나라와 일본의 협상이 실패로 끝나자 고니시는 자신과
사사건건 대립하는 가토 기요마사를 제거하기로 하고, 가토가 한반도로 건너오는 경로를 요시라를 통해 김응서에게
전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김응서가 이 정보를 조정에 전했고 조정은 이순신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지만 이순신이 이 정보의
진위를 의심하여 출격하지 않았다가 처벌받고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징비록'에 실려 있는 유명한 이야기다.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왜군 졸병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진영에 왕래시키며 정성스럽게 대하고 있었다.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왜군 졸병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진영에 왕래시키며 정성스럽게 대하고 있었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가 재출병하려 하였는데, 요시라가 김응서에게 비밀히 “우리 장군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말씀하시기로는,
지금 이 회의가 성사되지 못한 것은 가토 기요마사 때문으로 본인은 그를 매우 미워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 날에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인데 조선은 바다에서 잘 싸우므로 만약 그 때 바다 위에서 공격하면
그를 패배시키고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김응서가 이 일을 보고하자 조정은 그 말을 믿었다” ('교감해설 징비록' 482쪽).
▲ 고니시 유키나가가 김응서에게 요시라를 파견하다. 김응서의 모습이 그려진 드문 사례이다. “에혼 다이코기” 7편 권6. 김시덕 소장. |
카톨릭 다이묘였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에 맞서 싸우다가 패하여
처형되었다. 이후 탄생하는 도쿠가와 정권에서 고니시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시되었고,
오늘날 고니시와 관련된 주요 정보는 당시 일본을 관찰하던 카톨릭 선교사들을 통해 유럽에 전달된 보고서에서 확인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고니시가 요시라를 통해 김응서에게 전달한 정보가 진실된 것이었는가, 거짓된 것이었는가 하는
점을 일본측의 1차 사료에 의해 밝히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다.
다만, 결과적으로 김응서가 이순신과 원균이라는 두 명의 수군 장군을 위기에 몰아넣었다는 것이 당시 조선과 명나라 조정의
다만, 결과적으로 김응서가 이순신과 원균이라는 두 명의 수군 장군을 위기에 몰아넣었다는 것이 당시 조선과 명나라 조정의
인식이었음은 확인할 수 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은 김응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으며, 류성룡 역시 '징비록'에서 김응서를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 다만 전쟁의 최고 지휘자로서 류성룡은 모든 사람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낼 필요를 느끼고 있었으며, 김응서에게는 일본인들을 잘 상대하는 능력이 있음을 높이 평가하여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김응서가 결정적으로 조선시대에 좋지 않은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였다. 일본의 침략에
마지막으로, 김응서가 결정적으로 조선시대에 좋지 않은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였다. 일본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조선과 명나라 북방의 정예병이 남하한 틈을 타고, 아이신 기오로 누르하치(Aisin Gioro Nurhaci)가
여진인 세계의 통일 전쟁을 시작했다. 여허(Yehe) 등 일부 몽골계 여진 집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여진 집단을 자기 세력하에
넣은 누르하치는, 1618년에 '명나라에 대한 일곱가지 원한(七大恨)'을 내세우며 명나라에 선전포고했다. 이에 명나라는
조선 측에 원병을 요청했고, 광해군은 강홍립ㆍ김응서ㆍ김응하 등이 이끄는 1만 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약 3배의 우위를 보이는 명ㆍ조선ㆍ여허 연합군은 1619년에 요동반도 북쪽 무순(撫順) 근처 사르후(Sarhu)라는 곳에서
누르하치의 여진군과 충돌했는데, 이 전투에서 수적 우위에 있던 연합군이 패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잘 알려져 있듯이
조선군은 처음부터 사르후 전투에서 여진군과 정면충돌하지 말라는 방침을 갖고 있었던 것 같고, 강홍립은 이 방침에
충실했다. 이 방침을 몰랐던 것 같은 김응하는 적군의 화살을 맞아 고슴도치 형상이 되면서도 결사항전하다가 전사했고,
조선의 엘리트 집단은 김응하의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김응하가 전사한 불과 2년 뒤인 1621년에 김응하의 사적과
추모의 글을 엮은 '충렬록'이 편찬된 것이 그 증거이다.
강홍립과 김응하라는 대조적인 두 사람 사이에서 입장이 곤란해진 사람은 김응서였다. 김응서는 일단 강홍립과 함께
강홍립과 김응하라는 대조적인 두 사람 사이에서 입장이 곤란해진 사람은 김응서였다. 김응서는 일단 강홍립과 함께
누르하치 군에 투항했고, 조선의 엘리트 집단에게는 그가 강홍립과 마찬가지로 중화(명나라)를 버리고 오랑캐(여진)에
투항한 비겁자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김응서는 누르하치 군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신생 후금(後金) 국가의 동향을 조선에
전하고자 애썼고, 그러한 첩보 활동이 후금 측에 발각되어 1624년에 처형된다.
전투 당시 전사한 자만 영웅이고, 투항하여 살아남아 적의 정보를 본국에 알리다가 처형당한 자는 기념될만한 가치가 없는가.
일본과 후금이라는 남과 북의 두 세력에 맞서 최전방에서 싸웠으나 이순신이나 김응하처럼 장렬히 전사하지 못한 평안도
출신 김응서. 그는, 전쟁이란 무엇이며, 전쟁을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한국사회에게 묻는 문제적 존재이다.
이번 회에서는 상세히 다루지 못했지만, 김응서만큼이나 문제적인 인물이 고니시 유키나가이다.
이번 회에서는 상세히 다루지 못했지만, 김응서만큼이나 문제적인 인물이 고니시 유키나가이다.
유럽의 선교사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바다 사령관 아고스티노'라 칭송한 바 있는 카톨릭 장군 고니시 유키나가는,
임진왜란 당시에는 최전방에서 싸우면서도 전쟁을 끝내기 위해 분투했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히데요시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맞섰다가 패했다. 그리하여 김응서와 마찬가지로 역사에서 지워졌다.
이 두 사람의 마이너리티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좀 더 상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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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의 임진왜란 열전]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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