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매우 잘생긴 얼굴 때문에 한탄한 조선의 문신

바람아님 2015. 12. 12. 00:49

조선일보 : 2015.12.10

고대부터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묘사나 찬양은 많다. 하지만 남성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지는 것이 별로 없다.
삼국시대 미남 집단으로 알려진 화랑, 조선시대 '외모가 뛰어나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몇몇 왕들이 있는 정도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미남의 기준과 그 변천사를 조사해봤다.

지금이야 미남의 기준이 다양하지만, 과거 미남의 기준은 북방계형과 남방계형으로 나눌 수 있다. 북방계는 덩치가 크고, 어깨가 넓으며 피부가 하얗다. 또 넓은 이마, 쌍꺼풀 없는 가느다란 눈에 오뚝한 코, 얇은 입술이 특징이다. 남방계형은 키가 작고 어깨가 좁으며 쌍꺼풀진 눈, 두꺼운 입술을 가졌다. 고구려부터 현재까지 어느 쪽의 미남이 더 인기를 끌었는지, 당대 미남은 누가 있었는지 정리해봤다.

당염립본왕회도(唐閻立本王會圖)에 나온 6세기 각국 사신들 모습이다. 왼쪽에서 3번째가 신라 사신. 현재 대만 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름부터 '잘난 남자' … 고구려 미남 '호동(好童)왕자'

우리나라의 고대 미남으로는 고구려 시대의 왕자인 호동왕자(?~32)가 있다. 얼굴이 수려하여 부왕으로부터 각별한 총애를 받았고, 그래서 이름도 '호동(好童)'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호동왕자는 이름 외에도 낙랑공주 아버지와의 일화에서 그 외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함경도 지역 근처에서 사냥하던 낙랑국 왕 최리가 호동과 마주치자 호감을 느껴 말을 걸었다. "그대 외모를 보니 귀한 집 자손 같은데, 어디서 왔는가?" 호동이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이오" 답하자 궁궐로 데려가 융숭하게 대접하고 사위가 될 것을 제안했다.』호동은 최리의 제안을 받아 결혼을 약속했고, 이후의 일이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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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백옥, 입술은 붉은 연지와 같았다"

삼국시대의 미남하면 신라 화랑도 빼놓을 수 없다. <삼국사기>를 보면 화랑에 대해 '아름다운 남자들을 뽑아 곱게 단장하고 화랑이라 이름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화랑은 원래 남자가 아닌 여자였다. 화랑 이전에 원화라는 명망가 집안의 미녀들로 이뤄진 조직이 있었는데, 투기 탓에 우두머리인 준정이 남모를 살해한 이후 여성 대신 미모의 남자를 화랑으로 삼게 됐다. 그래서 전통을 따라 여성스러운 외모가 기준으로 남았고 화장도 하게 됐다고 한다. <화랑세기>에 보면 1대 위화랑에 대해 '공의 얼굴이 백옥과 같고 입술은 마치 붉은 연지와 같고 맑은 눈동자와 하얀 이를 가졌는데, 말이 떨어지면 바람이 일었다'라고 표현돼 있다.

1750년에 그려진 조광조 영정(왼), 영조 어진. 사진=위키디피아,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이것이 어찌 남자의 얼굴이란 말이냐" 스스로 한탄한 조광조

조선 시대에 와서는 왕이나 권력가에 대해 기록한 것을 보고 미남을 짐작할 수 있다. 15대 연산군(1494~1506)은 요즘 기준의 꽃미남이었던 듯하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10년에 보면, 지방에서 시위군으로 한양에 올라왔던 사람이 "지금 임금인 연산군은 허리와 몸이 가늘어서 위엄이 없다"고 뒷말을 했다가 의금부에 잡혀갔다는 기록이 있다. 인조 때 <죽창한화>에도 백세가 넘은 노인이 13세 때 한양에 갔다가 본 연산군을 회상하며 '얼굴이 희고 마른 체형에 키가 컸으며 눈가가 붉었다'라고 얘기했다.
성종과 중종 때의 문신이었던 조광조(1482~1519)는 당대의 미남이었다. 야사에 따르면 세수하다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이것이 어찌 남자의 얼굴이란 말이냐"라며 한탄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대의 류성룡(1542~1607) 역시 선조가 "너는 금옥처럼 아름다운 선비"라고 칭찬했고, 명과 일본에까지 그 잘생김이 알려졌을 정도였다.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1694~1776)는 당시 최고의 미인상이었다고 전해진다. 쌍꺼풀지고 길쭉한 눈과 오똑한 코에 조그마한 입술을 가졌는데 어머니의 외모를 물려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 어머니 숙빈 최씨가 양반출신도 아니면서 무수리에서 정1품 빈까지 신분상승한 것을 보면 숙빈최씨가 상당한 미인이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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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 왕자.

 

강렬한 눈매에 오뚝한 코… 조선의 마지막 황족 이우 왕자

정조의 오른팔 홍국영(1748~1781) 역시 미남이었다. 홍국영을 싫어하던 정조의 생모 혜경궁조차 그 외모를 인정했는데, <한중록>에 '매우 잘생기고 언변이 뛰어나서 내 아들을 홀렸다' 라고 기록돼 있다.


헌종(1834~1849)은 조선 시대 왕 중 가장 잘생겼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여색을 즐기는 왕 때문에 예쁜 궁녀들이 거의 승은을 입었다고 하는데, 헌종이 미남이라 궁녀들이 유혹한 것도 없지 않다. 잦은 성관계로 건강이 악화돼 고생하다 23세에 요절했다.
조선의 마지막 황족인 이우 왕자(1912~1945)는 사진이 남아 있다. 이우 왕자는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짙은 눈썹과 강렬한 눈매에 오뚝한 코, 갸름한 얼굴형이 요즘 미남에 가깝다.



(왼쪽부터)나훈아, 신성일, 남진, 박노식/출처=조선DB

'의리와 박력'이 곧 매력! (1950~1970년대) 

당시엔 한국전쟁, 정치 문제 등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전쟁을 겪으며 전우애와 의리가 어필했다. 이에 따라 강한 남자, 의리있는 남자가 시대의 미남으로 떠올랐다. 이때 인기를 끌었던 배우와 가수로는 신성일, 이대근, 박노식, 남진, 나훈아 등이 있다. 이들 모두 남성적인 이미지가 강한 스타로 부리부리한 눈, 크고 오뚝한 코와 다부진 체격을 가졌다.



(왼쪽부터) 안성기, 임성민, 선우재덕, 강석우

"주먹보다는 붓" (1980년대)

1980년대에는 고도의 산업 성장을 이룩하며 지적인 이미지의 남성이 시대의 미남으로 떠올랐다. 주먹 잘 쓰는 터프가이보다는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직 남성이 매력을 어필하게 됐다. 안성기, 강석우, 선우재덕, 박상원, 이영하, 임성민 등이 이 시대에 인기를 끌었다.



(왼쪽부터) 정우성, 안재욱, 김민종, 장동건/ 출처=조선DB

얼굴에 김 묻었어요, 잘생김!… 부드러운 조각미남(1990년대)

터프가이, 지적인 남성을 거쳐 1990년대엔 꽃미남의 시대가 도래했다. 누가 봐도 잘생김의 정석인 남성들이 미남으로 떠올랐다. 당시 여심을 흔들었던 스타들에는 정우성, 장동건, 이정재, 배용준, 김민종, 안재욱, 원빈 등 셀 수 없이 많다. 이들의 공통된 이미지는 남자다우면서도 모성본능을 자극한다는 것. 한마디로 부드러운 조각미남이 90년대의 대세 미남의 기준이었다. 



 (왼쪽부터) 조인성, 소지섭, 박서준, 김우빈 /출처=블랙야크, 조선DB, 스포츠조선

 쌍꺼풀 없는 눈에 모델 같은 몸매 (2000~현재)

1990년대까지는 쌍꺼풀 진 큰 눈망울이 남성의 매력이었다면, 2000년대에 들어서는 외꺼풀이 대세다. 살짝 찢어져 날카로운 듯 우수에 찬 눈매가 매력 포인트. 2000년대 미남 스타에는 조인성, 소지섭, 공유, 김수현, 유아인, 박서준, 김우빈 등이 있다. 또 미남의 기준으로 몸매 비율에 대한 비중이 이전보다 늘었다. 일단 얼굴이 작아야 하고, 몸매는 모델처럼 늘씬하고 키가 커야 한다. 이른바 8등신이 미남의 요건으로 꼽힌다.

  

  • 구성=뉴스큐레이션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