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신동아 2015년 3월호 조인직 대우증권 도쿄지점장)
- 일본 ‘잃어버린 시대’의 서막 ‘플라자 합의’
- ● 美 군정, 日 경제지원 위해 ‘1달러=360엔’ 결정
- ● 전 세계 필독서 된 ‘Japan as number one’
- ● 플라자 합의 이후 달러당 200엔대 붕괴
- ● 돈 풍년에 ‘흥청망청’…“개도 1만 엔 물고 다녀”
이 때문인지 한국에 대한 일본의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 한국의 경제규모가 일본의 10분의 1에 불과하던 20여 년 전만 해도 ‘무관심’이었다면, 2000년대 초중반은 월드컵과 초기 한류(韓流) 덕분에 ‘선의의 관심’으로 변했다. 그 이후 한일관계 악화와 일부 산업에서 한국의 경쟁우위가 맞물려 ‘비호감’으로 틀어졌다가 최근엔 질시와 초조함으로 뒤바뀌는 듯하다.
일례로, 2월 2일 한국은행에서 지난해 경상수지가 894억 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발표할 때, 방점은 ‘불황형 흑자’에 맞춰졌다. 이 소식을 전하는 일본 언론들은 2013년에 역대 처음으로 한일 간 경상수지가 역전된 데 이어, 2014년에는 그 차이가 더 벌어졌다는 점을 전면에 내세웠다. 삼성의 영업이익 추이는 늘 일본 주요 일간지의 머리기사로 다뤄진다. 세월호 참사, ‘땅콩회항’ 사건 같은 사회 기사들은 은근슬쩍 한국을 비하하고픈 ‘다른 의도’까지 겹쳐져 자국의 주요 뉴스보다 더 순발력 있게 실시간 속보로 인터넷과 신문지상을 덮는다.
장기간 지속되는 일본의 저성장은 거품이 생겼다가 급격히 꺼진 데 따른 후유증이라는 게 경제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진단이다. 그렇다면 바로 그 거품의 원인은 무엇일까.
1985년 플라자호텔의 악몽
일본에서는 30년 전인 1985년 9월 22일 미국 뉴욕의 플라자호텔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당시 G5 정상들이 만나 ‘엔화 절상’에 합의한, 이른바 ‘플라자 합의(Plaza Accord)’를 지목하는 이가 많다. 이후 엔화 가치는 2년여 만에 두 배 이상 올랐고, 이 때문에 일본 제품은 가격경쟁력이 떨어져 수출이 급감했다. 일본 정부가 내수 부양과 수출경쟁력 향상을 위해 저금리 정책을 펴자 부동산 투자로 이어지면서 거품 경제가 양산됐고, 그 거품이 사라지면서 결국 부동산 가격 급락, 기업과 은행의 무더기 도산으로 이어졌다. 그 후유증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반면 한국은 플라자 합의에 이은 엔화 절상에 힘입어 수출가격 경쟁력을 얻었다. 이를 발판으로 이듬해인 1986년에는 건국 이래 처음으로 경상수지 흑자(45억 달러)를 기록했다. 저달러·저금리·저유가를 의미하는 ‘3저 호황’의 수혜 중에서도 ‘엔고(高)’의 다른 말이라 할 수 있는 ‘저달러’의 공적이 지대했던 덕분이다.
일본 처지에서는 30년 전 엉겁결에 당한 ‘플라자호텔의 악몽’이 떠올라 지금의 아베노믹스, 즉 무제한 금융완화를 통한 엔화 가치 하락을 유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달러를 무제한 찍어내 자력으로 ‘게임 체인저(Game Changer)’ 노릇을 할 수 있는 미국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나라는 자국의 환율 상승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핸디캡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사도 거슬러 올라가자면 ‘플라자 학습효과’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등 겉으로 드러나는 치적을 위해 원화 절상 정책을 쓴 김영삼 정부는 결국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편입이라는 흑(黑)역사를 겪어야 했다. 반면 이명박 전 대통령은 최근 낸 회고록에서 원화 절하를 유도한 고환율 정책을 통해 리먼 사태 당시의 유동성 위기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했다고 주장했다. 이론(異論)의 여지는 있지만 환율 정책이 그만큼 국가 전체 명운을 가르는 절박한 조치라는 걸 알 수 있다.
‘넘버원 재팬’ 신드롬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에즈라 보겔 교수가 ‘Japan as number one’(세계 최고 일본)이라는 책을 쓴 것은 1979년이다. 이 책의 내용처럼 1980년대가 지나면 일본이 미국을 제치고 역전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던 시기였다. 이 책은 1990년대 초반까지 전 세계 지식인의 필독서였다. 그즈음 세계 곳곳의 경영대학원에서는 일본의 혁신사례를 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6·25전쟁을 통해 중공업 분야에서 가일층 탄력을 받은 일본 경제는 1차 오일쇼크 후 1974년 -0.5%로 주춤하던 시점까지, 다시 말해 1955년부터 1973년까지 평균 9.1%라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성장을 지속했다. 잠재성장률이 조금 떨어진 게 아니냐는 시선을 받을 즈음인 1970년대 중반부터는 기술혁신을 통해 세계적인 산업 트렌드를 선도했다. 특히 1차 오일쇼크에 맞춰 주력 업종을 기존의 철강·조선·석유화학 분야에서 발 빠르게 가전·자동차·반도체 분야로 옮겨간 게 주효했다. 그중에서도 ‘어코드’ ‘시빅’과 ‘워크맨’으로 대표되는 자동차, 전자산업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1970년 미국 의회에서 상원의원 에드먼드 머스키의 발의로 이른바 ‘머스키법’이라는 배기가스 규제법이 통과됐다. 일산화탄소, 질소산화물 등의 유해 배기가스를 5년 내에 10분의 1로 줄이지 않으면 미국에서 차를 팔 수 없도록 한 게 골자였다. GM과 포드 등 미국 업체들은 이를 ‘의회 로비’라는 미국식 방편으로 충분히 풀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일본 업체들은 ‘기술혁신’이라는 정공법을 택했다. 결국 1975년 혼다가 세계 최초로 완전 연소를 통한 고효율친환경 CVCC 엔진을 개발해 출시했다. 이에 힘입어 혼다는 1970년 미국에서 3만2000대를 판 소형차 ‘시빅’을 1975년에는 무려 18만7000대나 팔게 된다.
휴대가 가능한 스테레오 카세트인 소니의 ‘워크맨’ 역시 1979년 출시하자마자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각광받았다. 발매 15년 만인 1993년에 누적 판매대수 1억 대를 넘겼다. ‘워크맨’이라는 상품명은 부자연스러운 일본식 영어 조어였으나 브랜드화하는 데도 대성공, 1986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까지 등재됐다.
일본은 공식적으로 1968년부터 전 세계 GDP 2위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소련이 1985년까지 2위였다는 설도 있으나 당시 통계가 미비하다). 1974년에서 1990년에 이르기까지 동남아 개발도상국들에 버금가는 평균 4.2%의 성장률을 일궈내면서 ‘중단 없는 성장’을 이어갔다. 일본 경제의 순발력과 다대한 기술혁신이 이 같은 영광을 이뤄낸 점을 부인할 수 없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 각국에서 20년 이상 지속시킨 고정환율제의 영향도 컸다. 환율도 일종의 상품이라고 볼 수 있는데, 예컨대 지속적으로 향상된 품질의 제품을 늘 똑같은 가격(환율)에 판다고 하면 국가 간 무역역조는 피할 수 없다.
애당초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질서에서 미국 달러를 상대로 환율 개념을 본격적으로 규정한 것은 1944년 체결된 브레턴우즈 협정(Bretton Woods Agreement)이다. 미국 뉴햄프셔 주 리조트 지역이던 브레턴우즈에서는 2차대전 종전을 앞두고 미국, 영국 등 연합국 45개국 대표들이 참석해 전후 경제 질서를 논의했다. 이때 만들어진 협정은 그전까지 금(보조적으로 은도 사용)을 절대적인 국제통화로 인정한 체제에서 금과 달러를 양축으로 하는 통화체제로의 변화를 정식으로 추인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본토에는 아무런 피해도 없었던 미국은 후방 병참기지 및 자본조달시장으로서 위세를 떨쳤다. 그러면서 전 세계 금 보유량의 60% 이상을 점유했다. 세계의 은행 혹은 무역 거래 등에서 규칙을 유리하게 제정할 수 있는 ‘게임 체인저’의 위상을 확보한 것이다. 브레턴우즈체제에서 금 1온스(약 28.4g)는 35달러로 고정됐다(최근 금 1온스당 가격은 1300달러로, 70년 사이 달러 가치가 37분의 1로 떨어진 셈이다).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의 ‘강한 달러’ 정책 실패는 일본 엔화 절상을 골자로 한 ‘플라자 합의’의 단초가 됐다.
원조 대상에서 라이벌로
일본 엔화의 가치는 브레턴우즈 체제의 연장선에서 1949년 미 군정에 의해 ‘1달러=360엔’으로 결정됐다. 일본 저널리스트 이케가미 아키라의 저서 ‘전후 70년 세계경제의 자취’에 따르면 당시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미 군정은 자체 조사를 통해 1달러에 300~330엔을 적정 환율로 인식했다. 하지만 태평양 지역 자유민주주의 우방 국가로의 성장을 지원하자는 취지, 즉 수출 확대를 통한 일본 경제개발계획에 도움을 주는 차원에서 10% 정도 더 절하한 360엔으로 고정했다고 한다. ‘와(和)’를 좋아하는 일본 민족의 특성상 원(圓) 내각의 합인 360도를 연상시키는 이미지 공작이 일조했다는 설도 있다.
요즘 미국과 일본에 이어 유럽중앙은행(ECB)도 이른바 ‘양적완화’ 대열에 들어섰다. 말은 새로운 것 같지만, 사실 예전부터 있어온 고전적인 금융 정책이다. 무역거래가 조금 불리할 거 같으면 얼른 돈을 풀어 자국 화폐의 가치를 절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상품 판매를 유리하게 하는 행위다. 화폐도 하나의 상품이라고 볼 때 ‘무기한 할인판매’를 통해 손님을 모으는 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국에 입점한 루이비통이 수년 전까지 정가판매 원칙만 고수했듯, 자존심이 센 미국 역시 적어도 1960년대 말까지는 자국 통화를 ‘할인판매’하지 않는 전략을 고수했다. 그러나 원조 대상에서 라이벌로 어느새 격상한 일본은 물론, 독일 등 유럽의 경제 강국들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미국은 베트남전쟁(1965~1973년)에서 연간 GDP의 10%씩을 국방예산에 쏟아부으면서 재정과 경상수지 모두 악화해갔다. 고민하던 닉슨 대통령은 결국 1971년 8월 15일 “달러와 금의 태환(兌換·지폐를 정화(正貨)로 바꾸거나 그런 일)을 정지한다”는 내용을 담은 이른바 ‘닉슨 성명’을 발표했다. 심각한 무역역조로 인해 그동안 모아둔 금 준비금을 모두 소진한 상태여서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1971년 12월에는 워싱턴DC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선진 10개국 재무장관들이 만나 새로운 고정 환율로 달러와의 교환가치를 매기는 데 합의했다. 이때 달러당 일본 엔화 환율도 16.88%포인트 절하해 ‘1달러=308엔’으로 조정됐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각국의 기초체력에 맞춘 통화 절상 또는 절하 압력이 표면화했고, 1973년부터는 이탈리아, 스위스에 이어 일본도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로 정책을 바꾸게 된다.
안 되면 될 때까지!
닉슨 대통령의 성명(일본에서는 ‘닉슨 쇼크’라 불림) 발표와 스미소니언 협정, 그리고 변동환율제가 도입되면서 엔화는 308엔에서 지속적으로 하락해 1980년대 초반에는 250엔대에서 오르락내리락 했다. 1978년 2차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일시적으로 200엔대를 찍은 적도 있다. 그러다 1979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으로 취임한 폴 볼커가 오일 가격 상승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고금리 정책을 펴면서 달러 가치가 상승했고, 엔화는 다시 280엔까지 회복됐다.
일본 경제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면서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른바 ‘레이거노믹스’로 불리는 ‘강한 달러, 강한 아메리카’ 정책을 폈다. 냉전시대 군비경쟁까지 가세해 재정이 넉넉지 않았음에도, 감세(減稅)에 따른 경기회복을 도모하는 호기를 부렸다. 그 결과, 1980년 700억 달러로 GDP의 1% 수준이던 재정적자는 1984년 GDP의 5% 수준(2000억 달러)을 뛰어넘었고, 경상수지도 1982년 55억 달러 적자에서 1985년에는 1200억 달러(GDP의 2.8%) 적자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세계 최대 채권국으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하던 미국은 1986년 들어 대외채무가 대외채권을 상회하는 ‘순(純)채무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미국은 ‘강한 달러’ 정책을 버리고, 1985년 9월 22일 플라자 합의를 통해 그동안 정책적으로 저환율을 용인하며 ‘키워준’ 일본과 독일에 자국환 절상 압력을 노골적으로 강요하게 된 것이다.
1985년 9월 뉴욕 플라자호텔에 모인 미국, 일본, 서독, 영국, 프랑스 등 G5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대표들은 달러의 하락 및 엔화와 마르크화의 통화가치 상승을 유도하고, 이 조치가 통하지 않을 경우 각국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을 통해서 이를 달성한다는 내용에 합의했다. 요즘 유행하는 ‘무제한 양적완화’처럼 ‘안 되면 될 때까지 개입’이라는 강력한 신호를 시장에 보낸 것이다. 미국의 최우선 타깃은 무역역조가 가장 심각하던 일본이었다.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일주일 만에 엔화는 7%포인트, 마르크화는 8%포인트 절상됐다.
당시 미국과 일본 정책입안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플라자 합의’는 2개월 정도 사이에 환율을 10~15%포인트 조정하기 위한 단기적인 조치였다. 하지만 환율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기간도 예상보다 훨씬 길게 이어졌다. 합의 전날까지 달러당 242엔이던 엔화는 일주일 후 210엔까지 떨어졌고, 이듬해인 1986년 1월에는 200엔대마저 붕괴됐다. 그해 7월에는 150엔대, 다음 해인 1987년 말에는 120엔대로 주저앉았다.
“도쿄 23區 팔면 미국 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은 당시 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에 “대미(對美) 수출은 적당히 하고 일본 내수를 키워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했다. 미국의 안보우산 속에서 성장한 일본이 이를 거부하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1987년 일본은행은 5.0%이던 ‘공정보합(公定步合)’을 2.5%로 낮추는 금융완화를 실시했다. 공정보합은 일본은행이 시중은행에 대출해주는 정책금리다. 이로 인해 시중에 돈이 풀리면서 일본 경제에 거품이 끼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1990년대 ‘잃어버린 시간’으로 진입하는 단서가 되고 말았다.
일시에 돈이 시장에 쏟아지자 일본인들은 주체를 못하고 흥청망청 써대기 시작했다. 도쿄의 대표적 번화가인 긴자 거리에는 “지나가는 개도 1만 엔짜리 지폐를 물고 있더라”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도심의 나이트클럽은 매일 밤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또한 산업시설에 대한 재투자보다는 사람들의 투기 수요를 자극하면서 부동산과 주식투자 열풍이 불었다. ‘재(財)테크’란 말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됐다. 본격적인 버블이 시작된 1986년, 일본 닛케이종합지수는 1만3000 수준이었으나 1987년 2만2000, 1988년 3만에 이어 1989년 12월에는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최고점 3만8915를 기록했다. 2012년 말부터 아베노믹스로 인위적인 부양을 통해 2년여 동안 70%를 올린 현 수준이 1만7000대임을 감안할 때 당시의 과열 분위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일본 NTT(일본전신전화)는 버블의 절정기인 1986년 기업공개(IPO)를 통해 국민주 형식으로 일반인에게 주식을 팔았는데, 당시 1주에 119만 엔인 초고가주인데도 10대 1이 넘는 청약 경쟁률을 기록했다. 그리고 상장 2개월 만에 2.7배가 올라 역대 최고가인 318만 엔을 기록했다. 현재 주당 가격은 68만~71만 엔대. 30년 전 공매가의 60% 선을 겨우 넘어선 수준이다.
부동산은 주식이 정점을 찍고 하강기를 맞이한 이후에도 2~3년 더 거품을 이어갔다. 가격 상승을 예상하고 담보 평가액을 부풀려 시가의 120~200%까지 대출해주는 기현상도 나타났다. 서울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같은 존재감을 지닌 도쿄 시부야 구의 ‘히로오 가든힐즈’의 경우 1983~1985년 초기 분양가는 평당 240만 엔 수준이었으나 버블의 절정기인 1991년에는 6배 높은 1450만 엔으로 뛰었다. 이후 폭락을 거듭, 2015년 현재는 350만 엔대에 거래된다.
1990년에 일본 전체의 지가(地價) 총액은 2470조 엔으로, 당시 미국 대륙을 3개 사고도 남을 만큼 엄청난 규모였다. 미국 대륙 1개는 도쿄 23구(區)만 팔아도 충분히 살 수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미쓰비시 부동산이 1989년에 록펠러센터를, 부동산 재벌 요코이 히데키 가문은 1991년에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을 인수하며 위세를 떨쳤다.
‘플라자 학습효과’
일본이 20년 넘게, 특히나 경제지표상으로는 제자리걸음을 이어가는 배경으로 금리 정책의 실수나 미온적인 규제 개혁 등의 여파가 더 컸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1985년 플라자 합의에서 비롯된 인위적 엔화 가치 상승의 효과만큼 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30년이 지난 지금, 아베 총리는 무제한 금융완화를 일으켜 엔화의 급속한 하락을 선제적으로, 또한 지속적으로 도모 중이다. ‘플라자 학습효과’ 때문일까, 동맹국 미국도 일본의 행보를 묵인하고 있다.
입력 2015-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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