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經濟(內,外)

[이철호의 시시각각] 세계 통화전쟁 먹구름이 몰려온다

바람아님 2016. 2. 24. 00:11
[중앙일보] 입력 2016.02.22 00:54
기사 이미지

이철호 논설실장


일본과 유럽이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했다. 전 세계 경제 규모의 25%가 마이너스 금리권에 들어간 것이다. 물론 아직 마이너스 금리는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돈을 맡길 때만 적용된다. 하지만 예금 금리도 형편없이 떨어졌다. 일본에선 1억원을 은행에 저축하면 1년 뒤 겨우 2000원을 이자로 받는다. 예금 금리가 고작 0.02%다. 더 이상 이자 소득으론 생활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노인들의 연금은 안전할까. 연기금과 보험마저 장기간에 걸친 안정적인 자산운용이 불가능해져 혼돈에 빠져들고 있다.

 마이너스 금리는 제로금리·양적완화를 뛰어넘는 극단적 통화정책이다. 왜 이런 극약처방까지 동원할까. 일본은행은 “가계의 소비와 기업의 투자를 자극해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기 위한 조치”라고 주장한다. 돈을 저축하지 말고 소비하거나 주식·부동산에 투자하라는 것이다. 기업들도 자금조달 부담에서 벗어나 투자와 생산을 늘릴 것으로 기대한다.

 문제는 중앙은행의 의도대로 가계와 기업이 움직이지 않는 현실이다. 요즘 일본과 유럽에는 금고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차라리 침대 밑에 현금을 쌓아두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항해 유럽 중앙은행의 마리오 드라기 총재는 “고액권인 500유로(약 70만원) 지폐를 아예 없애는 방안을 고민 중”이라고 했다. “돈세탁이나 범죄 악용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하지만, 속셈은 따로 있다. 마이너스 금리 효과를 제대로 거두기 위해 아예 고액권을 없애 현금을 보관하기 어렵게 만들려는 꼼수다.

 마이너스 금리는 통화정책의 최종 수단이다. 하지만 진짜 소비와 투자를 자극할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중앙은행의 화력이 바닥났다며 가계와 기업이 위축될지 모른다. 실제로 “오죽 경제가 안 좋으면 저런 마지막 카드까지 꺼냈을까”라며 더욱 몸을 사리는 분위기다. 디플레 차단이라는 당초 목표와 정반대로 가계와 기업들은 더 심각해질 디플레에 대비해 소비와 투자를 줄이는 추세다. 또 하나의 부작용은 금융기관들의 피해다. 마이너스 금리의 직격탄을 맞은 유럽·일본 은행들의 주가는 20% 이상 폭락했다. 예대마진이 줄어 수익성이 악화될 것이란 공포 때문이다.

 그런데도 준(準)기축 통화국인 유럽과 일본이 마이너스 금리를 강행하는 속셈은 뭘까. 한마디로 외국 자금을 밀어내고 통화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서다. 덴마크와 스위스가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한 것도 자국 통화인 크로네와 스위스프랑의 급속한 절상을 막기 위해서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중국 경제가 휘청대고 국제원유 가격이 곤두박질하자 마이너스 금리 카드를 빼들었다. 일본 투자자들이 해외자산을 팔아 국내로 반입하고, 국제 자금도 안전자산 쪽으로 도피하면서 엔화 가치가 급속히 절상됐기 때문이다. 이런 엔 강세로 일본 경제는 지난 연말부터 다시 마이너스 성장에 빠졌고, 올 1월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12.9%나 뒷걸음질쳤다. “경제는 심리”라던 아베노믹스가 디플레 심리 때문에 위험해진 것이다.

 일본과 유럽의 마이너스 금리는 단순한 통화정책이 아니다. 바로 세계 통화전쟁을 의미한다. 환율 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나 다름없다. 일본·유럽의 마이너스 금리는 단기적으로 자신들의 통화 강세를 막을지 모른다. 하지만 세계적 투자자 짐 로저스는 “장기적으로 금융의 아마겟돈(최후 종말)이 다가올 것”이라 경고한다. 마이너스 금리가 경기부양은커녕 주식·부동산의 자산 거품을 불러 더 끔찍한 재앙을 초래할 위험한 정책이란 것이다.

 미국이 금리 인하를 다시 만지작거리고, 국내에도 기준금리 인하를 압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마이너스 금리·양적 완화 같은 무지막지한 실험은 기축·준기축 통화국의 전유물이다. 원화 같은 주변부 통화의 기준금리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는 게 좋다. 원화 환율도 가능한 한 시장에 맡겨두고 말이다. 일단 유동성 함정에 빠져버리면 유럽·일본과 달리 우리는 한 방에 훅 갈지 모른다. 전 세계가 어느새 재정절벽·소비절벽·인구절벽 등 온갖 절벽투성이다. 마이너스 금리로 인해 정책절벽까지 다가왔다. 한국도 언제 화폐전쟁에 휩쓸릴지 모른다. 최악에 대비해 최종 병기는 최대한 아껴두는 게 좋다.

이철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