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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략을 품은 일대일로(3)-실크로드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이다

바람아님 2016. 2. 25. 00:16
[J플러스] 입력 2016.02.23 18:18

일대일로의 본질에 좀더 접근하려면 실크로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실크로드’라는 용어부터 보자. 역설적이게도 중국에서 오지 않았다.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1833~1905)은 1869년~1872년 중국 각지를 여행하고 『중국(China)』이라는 5권의 답사기를 남겼다. 그는 제1권 후반부에 동서교류사를 개괄하면서 “고대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시르다리야 강(중앙 아시아의 톈산산맥 서쪽에서 발원하여 카자흐스탄을 통과해 아랄 해로 유입)과 아무다리야 강(아프가니스탄의 힌두쿠시 산맥에서 시작하여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아랄 해로 유입) 사이에  있는 트란스옥시아나 지역과 서북인도로 가는 무역로가 있었는데 주요 수출 품목은 비단이었다. 이에 따라 이 교역로를 독일어 ‘자이덴 슈트라센’(비단길·Silk Road)으로 명명한다”고 했다. 비단길이라는 명칭의 사상 첫 문헌 기록이다.  

동서양 지리학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지중해 연안 시리아와 터키·로마에서까지 중국의 견직물이 발굴되자 시안(西安)~로마를 잇는 1만 2000㎞를 고대 육상실크로드로 규정하고 명명했다. 실크가 중국에서 수출됐지만 인류문명의 교류 통로로서의 실크로드 개념은 유럽중심주의 문명사관에 뿌리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실크로드는 중국 한나라 때 장건(張騫·BC?~BC 114)과 명나라 때 정화(鄭和·1371~1433)를 빼놓을 수는 없다.
 한 무제가 흉노 제압을 위해 서역(西域·현재의 중앙아시아) 지역에 있는 월지(月氏)와 동맹을 맺기 위해 한중(漢中) 출신의 낭관(郎官·정4품 이하의 관리)인 장건을 파견한 것은 기원전 139년 경. 장건은 월지로 가는 도중 흉노에 생포돼 10여 년간 억류됐다. 이후 그는 흉노를 탈출해 월지에 도착했지만 흉노를 협공하기 위한 한·월지 동맹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황제로부터 받은 임무는 완성하지 못했지만 13년여 만에 귀국한 장건은 견문록을 남겼고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 중국과 중앙아시아 실크 교역의 물꼬가 터졌다. 그가 동서 문명 교류의 선구자이자 개척자라는 칭호를 받는 이유다.
 

  동서 무역로를 개척한 장건


명나라 환관이자 무장이었던 정화가 없었다면 해상실크로드도 없었을 지 모른다. 그는 영락제의 명을 받아 모두 7차례, 28년에 걸쳐 하서양(下西洋·정화의 서양 원정)하며 해양 무역로(일로)를 개척했다. 이 기간 중 그가 방문한 나라는 무려 30여 개국이었고 항해 거리도 10만여 리를 넘었다. 원정단 규모도 엄청나 1405년 첫 항해 시 동원된 선박만 62척에 승선 인원은 무려 2만 7800여 명에 달했다. 15세기 전반에 제작된 정화항해도(작자 미상)를 보면 원정단이 항해했던 난징(南京)~몸바사(동아프리카 케냐) 구간에 표기된 지명이 500여 개에 달하는데 이중 300여 개가 외국 지명이다. 그의 하서양 후 몰디브와 아덴 등 명과 교류가 없었던 21개 국가에서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바친 것으로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중국이 실크로드의 문명적 재산권(?)을 주장하며 일대일로 책략을 주도한 이유일 것이다.

 

         정화의 항해도


 
중국 정부는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지난해 4월 앞으로 추진할 일대일로 5개 노선을 구체적으로 공개했다. 육상의 경우 3개 노선인데 중국~중앙아시아~러시아~유럽, 중국~중앙아시아~페르시아만~서아시아~지중해, 중국~동남아시아~남아시아~인도양 노선이 그것이다. 해상의 경우 중국 연해항구~남중국해~인도양~유럽과 중국 연해항구~남중국해~남태평양 등 2개 노선이다. 

 

 

청말(淸末) 서구식 근대교육시스템 도입에 앞장섰던 장지동(張之洞)은 그의 저서 『권학편(勸學篇)』에서 '중학위체서학위용(中學爲體西學爲用)'이라 했다. 중국 전통의 유학(儒學)을 기본으로 하되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해 근대 서양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식 실용주의인 ‘중체서용(中體西用)’ 사상이 나온 배경이다. 유럽중심 문명사관인 ‘실크로드’를 중국식 사회주의와 결합해 일대일로 세계 도략으로 발전시킨 시진핑은 중체서용을 주장했던 장지동, 그리고 청말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하고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주도한 경세가 증국번(曾國藩·1811~1872)을 닮았다.  

최형규 중국전문기자 
 
 [참고자료]
 중체서용(中體西用) : 양무(洋務) 운동의 기본사상

청왕조 말기 외국 열강의 침입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좌종당(左宗棠) 등이 주도한 양무운동이 진행되었다. 이 운동의 기본사상은, 중국의 전통적 유교도덕을 중심으로 하여 서양의 과학기술과 그 성과를 도입, 강화해 가는 것으로서 '중국의 학문을 체(體)로 하고 서양의 학문을 용(用)으로 한다'는 것이 '중체서용론'이다.

 

청일전쟁이 그 빛을 잃은 이후에도 장지동(張之洞)은 양무운동을 전개하여 당시의 변법유신운동(變法維新運動)을 비판한 <권학편>(勸學篇)을 써서 '중체서용론'을 내세워 국민에게 강한 이념을 심어주었다.

'중체서용'은 청(淸)나라 때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 이후 일어난 양무(洋務)운동의 기본사상을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