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선죽교의 핏자국

바람아님 2016. 3. 2. 00:10
경향신문 2016.03.01. 21:11

“선죽교 낭자한 핏자국을 보고(善竹橋頭血)…충신이 나라의 위기를 맞아(忠臣當國危) 죽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겠는가(不死更何爲).” 1947년 백범 김구 선생은 개성 선죽교를 탐방하고 비분강개했다. 18세기 실학자인 이덕무(1741~1793) 역시 가슴 찡한 시를 남긴다. ‘선죽교 위에 흥건한 피 흔적에 붓을 푹 적셔 포은을 위한 진혼가를 써서 바치겠다’(<청장관전서>)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덕무의 선죽교(사진) 기행문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개성의 선죽교를 찾아 다리 위를 맴돌았으나 충신이 흘린 피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찌 된 일인가. 1392년 포은이 순절한 다리에서 충절의 상징인 대나무가 솟아 선죽교라 했으며, 지금도 피의 흔적이 역력하다는 백범의 믿음은 대체 무엇인가. 반면에 이덕무는 왜 가보지도 않고 ‘피 흔적’ 운운했다가 막상 현장을 찾은 다음, 핏자국을 볼 수 없었다고 고백했을까. 사실 조선 중기까지 포은의 ‘선죽교 순절’ 기록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다 1581년 윤두수가 슬그머니 흘린다. 포은을 남송 시대의 충신 문천상(1236~1282)에 비유하면서 “선죽교에 천년의 푸른 피가 남아있다”(‘성인록’)고 한 것이다. 

허균 역시 “선죽교 위에 뿌려진 한 줄기 피(善竹橋頭一腔血)”(<성소부부고>)라 했다. 급기야 1740년 선죽교를 찾은 영조는 “포은의 곧은 절개는 태산처럼 높다(泰山高節圃隱公)”는 글씨를 써서 비문에 새긴다. 1882년 고종은 “선죽교 위 혈흔이 마치 새 것인 양 뚜렷하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임금들까지 나서 포은의 ‘선죽교 순절’을 공인했으니 선죽교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충절의 성역’이 됐다. 북한 역시 국보(159호)로 삼아 충절의 성소로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

개국조선의 ‘간신’인 포은이 만고의 충신으로 거듭난 이유는 분명하다. 포은의 절개는 창업(創業)에는 걸림돌이지만 수성(守成)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정권을 잡은 이상 만고충신의 상징으로 포은을 추앙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착각하면 안된다. 포은의 충절은 무조건의 충성이 아니다. 1478년(성종 9년) 김계창의 상언이 핵심을 찌른다. “(송나라 시인) 소동파는 ‘평시에 할 말 다하고 극간을 하는 자는 절의있는 선비이고, 아부하며 순종하는 자는 간신’이라 했습니다. 고려왕조엔 정몽주와 길재 두 사람뿐입니다. 임금은 절의있는 선비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기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