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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선생님][뉴스 속의 한국사] 도둑질하면 12배 배상… 부여에선 죄짓고 못 살겠네

바람아님 2016. 3. 7. 10:08

(출처-조선일보 2016.03.07 김지연 기자,지호진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형벌이 엄했던 나라 '부여']

형벌로 질서·권력 유지한 부여… 살인은 사형, 절도는 12배 배상 물려
사회질서 수준 높고 범죄율 낮아

고조선 이후 700년 동안 존재하고 고구려·백제 설립에 큰 영향 줘

영남제분 회장 아내 윤씨가 22세 여학생을 살해한 뒤, 가짜 진단서를 받아 교도소에 갇히지 않고 호화 입원 생활을 한 
사건이 있었어요. 진상이 밝혀지자 많은 사람이 분노했고, 윤씨는 2년 전 재수감되었지요. 
지난달 20일 피해자 여학생의 어머니가 딸을 잃은 슬픔으로 죽음에 이르자, 대중은 비인륜적 범죄자에게 내리는 벌이 여전히 
너무 약하다고 주장해요. 
형법을 더 엄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피해자에 대한 동정심뿐 아니라, 범죄 예방이라는 근거도 있답니다.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존재했던 부여는 형법이 매우 엄격했답니다. 
부여의 사회질서는 어땠을까요?

범죄자에게 엄격한 나라… 서로 공손했어요

기원전 100년 무렵, 한반도 남쪽에 살던 사람들이 모여 북만주의 어떤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그 나라는 죄를 지으면 형벌이 무시무시하다며?" 
"살인죄를 지으면 당연히 사형이고, 가족까지 노비가 돼. 
심지어 질투가 심해도 사형이래. 
도둑질을 하면 열두 배로 갚아야 하고." 
"그 나라 형벌은 정말 무시무시하구나!" 
"그래야 사람들이 함부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지." 
이 사람들이 말하는 형벌이 무서운 북쪽 나라는 한민족의 초기 국가 중 하나인 부여였지요.
[뉴스 속의 한국사] 도둑질하면 12배 배상… 부여에선 죄짓고 못 살겠네
▲ /그림=이혁
부여의 법률이 무척이나 엄격했다는 이야기는 중국 역사가인 진수라는 인물이 쓴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자세히 적혀 있어요. '형벌을 사용함에 엄하고 급하며, 살인한 자는 죽이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 
도둑질한 자는 열두 배로 갚으며, 남녀가 간음하거나 아내가 투기(妬忌·질투라는 뜻)하면 모두 죽인다. 
특히 투기를 미워하여, 시신을 나라의 남쪽 산 위에 두고 썩힌다. 
여자 집에서 이를 찾아오려면 소나 말로 갚은 후 옮긴다.' 
부여의 법률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전해지는 네 조항은 '부여의 4조목법'이라고 부른답니다. 
이 중 특히 유명한 조항은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열두 배로 물어주어야 한다'는 내용이에요. 
그래서 이를 특징으로 삼아 부여의 법을 '1책12법'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한 가지 책 잡히는 잘못을 하면 12배로 물어줘야 한다는 의미지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부여 사람들의 외모·성격에 대해서도 기록했어요. 
'부여 사람들은 과격하고 크며, 성격은 강하고 용감하며, 몸가짐이나 말과 행동을 조심스럽게 할 줄 알고, 
성품이 어질고 덕이 많아 도둑질하지 않는다. 여럿이 모일 때 공손히 서로 예의를 지킨다'
범죄자한테는 엄하고, 공손할 때는 예의를 지키는 모습이 현대국가랑 비슷하죠? 
그런데 부여는 왜 그렇게 형벌이 엄했을까요?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중요하게 여긴 사회질서 때문이지요. 
또 부여의 지배층인 대사·사자 등이 자기들의 재산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통치 질서를 엄격하게 지켰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고구려·백제의 뿌리가 된 나라

부여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만주 쑹화강 근처에서 다섯 부족이 연합해 세운 나라예요. 
이렇게 몇몇 부족이 연합하여 왕국을 이룬 것을 '연맹 왕국'이라고 불러요. 
부여를 이룬 5부족 중 가장 힘센 부족의 우두머리가 왕이 되어 중앙 지역을 다스렸어요. 
나머지 네 족장은 지방 영토를 나누어 다스렸는데, 
그들의 호칭은 흔히 기르는 가축을 빗댄 마가(馬加·말의 우두머리라는 뜻의 부여 단어), 우가(牛加·소의 우두머리), 
저가(猪加·돼지의 우두머리), 구가(狗加·개의 우두머리)였어요. 이런 부여식 지방자치를 '사출도'라고 불렀답니다.

부여는 넓고 비옥한 평야 지대에서 농경과 목축을 하면서 성장했어요. 
해마다 추수를 마친 뒤 12월이 되면 온 나라 백성이 동네마다 한데 모여서 하늘에 제사 지내며 노래와 춤으로 잔치를 
벌였다고 해요. 하늘을 숭배하는 제사를 '제천의식'이라고 하는데, 부여는 제천의식 이름이 '영고(迎鼓)'였어요.

부여는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나라인 고조선 다음 두 번째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고조선이 멸망하기 전부터 부여는 이미 세력을 키워나갔고, 
고조선 멸망 이후 만주 지역에서 가장 크고 강한 나라로 성장했지요. 
전성기 무렵에는 영토가 동서남북으로 2000리에 이르고, 인구도 40만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집니다. 
약 700여 년 역사를 이어오던 부여는 기원후 3세기 말 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국력이 약해지고, 
결국 고구려에 493년 흡수됩니다.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가 세워지는 데 큰 영향을 주었어요. 
고구려를 세운 주몽은 부여 지배층 세력의 한 갈래였어요. 
고구려 초기의 정치 제도와 법률은 부여와 무척 닮았답니다. 
백제를 세운 온조는 주몽의 아들로, 자신을 부여의 후손이라고 여겼지요.

[부여·고구려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중앙·4출도를 합쳐 5부 체제였던 부여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도 5부 연맹체였어요. 
또 부여의 영고처럼, 고구려에도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가 있어 추수가 끝난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지요. 
한편 쑹화강 유역에 위치해 곡식 농사에 적합한 부여와는 달리 산악 지대에 위치한 고구려는 농사지을 땅이 부족해 
식량이 충분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고구려의 정복 사업이 발달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