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아트칼럼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104] 우리를 바라보는 19세기 파리 소녀들

바람아님 2013. 6. 21. 15:36

사람 키보다 큰 청화백자 도자기와 붉은 병풍을 세워둔 동양풍의 실내는 19세기 말, 파리의 한 부유한 주택가 

아파트의 거실이다. 원피스 위에 흰 앞치마를 똑같이 겹쳐 입고, 자기들끼리 놀고 있던 네 자매가 얼음처럼 

멈춰 섰다. 화면 오른쪽에 반이 잘려나간 도자기, 왼쪽 구석으로 치우친 구도는, 그 앞에서 그림을 보는 

우리가 마치 그 집에 갑작스레 들이닥쳐 소녀들과 눈이 마주친 손님이 된 것 같은, 그런 순간적이고 우발적인 

느낌을 준다.

 존 싱어 사전트, '에드워드 달리 보잇의 딸들' - 1882년, 캔버스에 유채, 222.5×222.5㎝, 보스턴 미술관 소장.


 소녀들은 파리에서 아마추어 화가 생활을 하던 부유한 미국인이자 화가 존 싱어 사전트
(John Singer Sargent·1856~1925)의 친구였던 보잇의 딸들이다. 인형을 안고 앉아 순진무구한 얼굴로 
우리를 보는 꼬마가 네 살배기 줄리아, 그 뒤에 호기심과 경계심이 뒤섞인 눈빛으로 뒷짐을 지고 서 있는 
건 여덟 살 마리 루이자, 슬금슬금 뒷걸음질하는 아이는 열두 살 제인, 재빨리 몸을 돌려 도자기에 기대선 
건 열네 살 플로렌스다.


넷 중 어느 누구도 화면의 중앙에 있지 않고, 그나마 큰 아이 둘은 어둠에 가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얼굴을 그리는 게 초상화라면, 이 그림은 자격 미달이다. 그러나 사전트는 아직 낯 가릴 줄 모르는 

어린아이로부터 온통 세상에 대한 경계심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사춘기 소녀까지, 채 십 년이 

못 되는 시간 동안 아이들이 겪게 되는 성장 과정과 심리의 변화를 대범하게 그려냈다.

현재 이 그림은 보스턴 미술관의 한 전시실에 실제 그림 속에 등장하는 큰 도자기 둘을 양옆에 두고 걸려 있다. 

지금도 그 앞을 지나자면, 갑작스러운 방문객에 움찔 놀라는 소녀들의 숨죽인 호흡이 느껴지는 것 같다. 

(글출처: 조선일보,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