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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에서] '한국의 겐셔'는 없는가 안용현 정치부 차장

바람아님 2016. 4. 19. 07:39

(출처-조선일보 2016.04.19 안용현 정치부 차장)


안용현 정치부 차장지난 1일 사망한 한스 디트리히 겐셔 전 독일 외교장관은 1974년부터 92년까지 무려 18년이나 
독일 외교를 책임졌다. 그가 오래 재임하며 통일 외교의 시작과 끝을 주도한 데는 비결이 있었다.

동독 출신인 겐셔는 25세 때인 1952년 서독으로 탈출해 자유민주당(FDP)에 입당한 이후 조국 통일에 
평생을 바쳤다. 자유민주당을 이끌면서 '동방정책(동서 화해)'을 내세웠던 사회민주당(SPD)과 연정을 
맺은 뒤 1974년 외교장관에 올라 동방정책을 지휘했다. 그러나 사민당이 좌경화하자 연정을 깨고 
기독민주당(CDU)과 손잡았다. 
1982년 집권한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는 겐셔에게 다시 외교장관을 맡겼다.

콜은 동독을 불법 집단이라고 생각했고, 겐셔는 화해 대상으로 봤다. 
둘의 견해는 달랐지만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은 저서 '독일 통일과 유럽의 변환'에서 '콜과 겐셔는 독일 전체에 
대한 민족적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고 썼다. 이 분석은 정확했다. 
1989년 통독(統獨) 문제가 급물살을 타자 둘은 역할 분담에 나서 콜은 미국, 겐셔는 소련을 설득했다. 
당시 소련은 통일 독일이 미국 주도의 안보 기구인 나토(NATO)에 남는 것을 맹렬히 반대했다. 
반면 미국은 '나토 잔류'를 통독의 필수조건으로 여겼다.

겐셔는 1990년 셰바르드나제 당시 소련 외무장관을 2차 대전 때 독일과 소련의 격전지였던 브레스트
(현재 벨라루스 지역)에서 만났다. 셰바르드나제의 친형이 1941년 전사한 곳이다. 
겐셔는 모든 일을 제쳐 놓고 셰바르드나제 형의 무덤부터 찾아 묵념했다. 당시 동행한 셰바르드나제가 처음으로 독일의 
나토 가입 이슈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겐셔가 셰바르드나제의 마음을 움직인 덕분에 통독의 최대 난제를 풀 실마리를 
찾은 순간이었다. 통독 협상 막판, 이번엔 영국이 "나토 작전 지역에 동독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소련으로선 절대 받을 수 없는 제안이었다. 겐셔는 자정을 넘겨 제임스 베이커 당시 미 국무장관 숙소로 달려갔다. 
잠옷 차림으로 겐셔를 만난 베이커는 "서독이 나토에 머물면 동독에 군대를 배치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김정은 시대 들어 북한 고위급 인사의 탈북이 이어지고 있다. 해외 식당 종업원 13명도 처음으로 집단 탈북했다. 
이는 난민 사태에서 비롯된 동독 붕괴를 떠올리게 한다. 
겐셔는 통독 10주년인 지난 2000년 한국 매체 인터뷰에서 "(한반도 통일은) 한국 국민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될 것"  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되도록 빨리 통일을 추진하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한반도 변화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지 모른다. 
'사상 최강'이라는 대북 제재 속에서도 결정적 순간 중국의 마음을 움직이고 북한을 꿰뚫어볼 인물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권 교체 때마다 외교·안보 라인이 180도 바뀌는 풍토에선 겐셔 같은 인물은 나오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