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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보고서'는 진상 규명 외면한 정치 문서"

바람아님 2016. 6. 2. 09:30

(출처-조선일보 2016.06.02 이선민 선임기자)

[현길언 교수, 보고서 종합 분석한 '정치권력과 역사왜곡' 출간]

'건국 방해 남로당 반란' 외면하고 진압 과정 反인권 사안만 초점… 
대한민국 부정史觀 정부가 수용

"2003년 발표된 정부의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지표를 구현하기 위해 
강만길 교수식(式)의 역사관에 따라 편향적인 집필진에 의해 쓰여진 반(反)역사적인 정치 문서다."

정부의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이의를 제기해 온 소설가 현길언(76·사진) 전 한양대 교수가 대통령 공식 사과와 각종 추념 
사업의 근거가 된 4·3보고서의 작성 배경과 과정, 내용을 종합적으로 비판하는 '정치권력과 역사왜곡'(태학사)을 펴냈다. 
558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에서 현 교수는 4·3보고서와 관련 자료, 회의록, 연구논저 등을 꼼꼼히 검토하면서 보고서가 
4·3의 역사적 실체를 규명하지 않고 정치 권력자의 이념을 뒷받침해주는 왜곡된 문서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사진/이진한 기자)

4·3보고서는 2000년 1월 공포된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만들어졌다. 
특별법 제정과 시행을 주도한 세력은 4·3사건이 남로당이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한 반란이라는 점을 외면하고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반(反)인권적인 사안만 문제 삼아 
보고서 작성의 방향을 설정했다. 
그보다 선행돼야 할 4·3사건의 실상과 그 주역인 남로당의 
무장 반란 등에 대한 진상 규명은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게 
현 교수의 주장이다.

이런 정치적 의도는 특별법 시행을 주관하는 조직 구성부터 
드러났다. 전체를 총괄하는 위원회와 실무를 담당하는 
기획단의 민간 참여자들은 대부분 진보좌파 인사로 구성됐다. 
기획단 12차 회의록에는 2003년 2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강만길 교수 등 진보적인 학자들을 참여시켜서 의미 규정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지시했다는 
수석전문위원의 보고가 들어 있다. 
민간위원이었던 한광덕 전 국방대학원장의 증언에 따르면 
강만길 교수는 회의에서 "4·3사건은 먼 역사적 관점에서는 
최초의 통일 시도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획단장은 당초 국사편찬위원회 간부가 내정돼 국무총리 
승인까지 받았지만 주도 세력이 김대중 청와대와 접촉하여 
박원순 변호사를 선임했다. 
조사와 보고서 작성 실무진에 '4·3 민중운동사' 취재와 저술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대거 참여했다.
 
4·3특별법에 따른 추념 사업의 하나로 2008년 3월 문을연 제주 4·3 평화기념관. /조선일보 DB

인적 구성의 편향성은 조사와 보고서 작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4·3사건 초기 반란을 주도한 남로당 제주도당 산하 인민유격대의 활동을 기록한 '노획문서'와 반란을 진압한 미군정 자료 등 
공적인 1차 자료가 있는데도 실무진은 이를 외면하고 진압군에게 피해를 당했다는 증언과 일부 관련자의 회고록에 주로 
의지했다. 
4·3사건의 발발에 대해서도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군부에 침투시킨 프락치 등을 통해 치밀하게 준비했고 
남로당 중앙위원회가 반란을 격려한 점은 무시하고 "남로당 중앙당의 지시가 있었다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며 
경찰과 미군정에 대한 제주도민의 불만과 저항이 터져나온 것으로 규정했다.

4·3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거부하는 반란이므로 국가 보위의 책임을 진 대통령은 당연히 진압의 책임이 있다. 
그런데도 보고서는 진압 작전을 대통령의 통수권 행사가 아니라 이승만의 정치적 입지 구축을 위한 정략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하고, 미군이 이를 비호했다며 비난했다. 
4·3사건의 전개와 진압 과정에서 많은 피해자가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복잡하게 얽힌 상황에서 쌍방에서 발생했다. 
하지만 보고서는 진압군에 의한 피해만 강조하고 무장대에 의한 피해는 도외시했다. 
보고서 작성자들이 내용의 틀을 미리 짜놓은 뒤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자료만 이용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외면했다는 것이다. 
현 교수는 "4·3보고서의 왜곡은 그 자체도 문제지만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사관으로 현대사를 다시 쓰려는 시도를 
정부가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더하다"고 말했다.

제주 출신으로 제주대 교수를 역임한 현길언 교수는 이렇게 왜곡된 보고서를 토대로 이뤄지고 있는 4·3사건 추념사업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다. 
'치욕스러운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이에 저항하는 의로운 4·3항쟁'을 강조하는 전시와 교육이 제주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현 교수는 "4·3사건은 인권 침해가 아니라 이념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전형성을 지닌다"
 "이제라도 4·3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기관에서 보고서를 보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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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 "그런데, 역사학자들은 뭐하고 있죠?"

(출처-조선일보 2015.04.09 김기철 문화부 차장)


김기철 문화부 차장 사진제주 출신 소설가 현길언 전 한양대 교수(국문학)는 아홉 살 때 4·3사건을 겪었다. 

제주 남원읍 수망리 중산간 마을에 살던 그의 가족에게 군경(軍警) 토벌대는 저승사자였다. 

동네에 들어온 토벌대는 겁에 질려 달아나는 주민들에게 다짜고짜 총질했고, 집을 불태웠다. 

남로당이 일으킨 무장폭동 동조 세력으로 의심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친척집 제사에 가던 소년 현길언도 검문에 걸려 죽을 뻔했다. 

토벌대원 하나가 다행히 할아버지를 알아봐 화를 면했다. 그는 셋째 삼촌이 4·3 직전 경찰에 투신한 

경찰 가족이었다. 하지만 경찰 가족의 안위도 보장받지 못할 만큼 험한 세상이었다.

얼마 후 가족들은 남원면 해안 마을로 피란갔다. 이번엔 마을을 습격한 폭도들에게 할머니가 변을 당했다. 

담을 넘어 피하려던 할머니를 청년 두엇이 달려들어 철창으로 아랫도리를 마구 찌른 것이다. 

남원 마을 400호가 불타고, 60여명이 죽었다. 할머니도 후유증 때문에 두어 해 뒤 세상을 떠났다. 

습격 얼마 뒤 지서(支署)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경찰이 붙잡은 폭도들을 데려와 유가족들에게 한(恨)을 풀게 한 것이다. 

폭도들은 분노에 찬 유가족들의 몽둥이세례를 받으며 죽어갔다. 소년 현길언도 그 자리에 있었다.

다음 날 새벽, 할아버지는 지서에 찾아갔다. 아는 친척의 시신을 거둬주려 한다고 했다. 

전날 처형된 시신들이 엉켜 있는 곳에서 할아버지는 막내 삼촌의 시신을 발견했다. 

식구들은 그날 마을을 습격한 폭도 무리 속에 막내 삼촌이 끼어 있지는 않았을까 걱정했었다.

현 교수는 이런 가족사를 담담하게 들려줬다. 

대부분 제주 사람들과 비슷한 분량의 고통일 뿐, 특별한 얘기는 아니라고 했다. 

그가 몸으로 살아낸 4·3사건은 살아남기 위해 도망 다니다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2003년 노무현 정부 당시 발표한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는 '건국 초기 단선(單選) 정부 수립이라는 부끄러운 

역사에 저항한 사건'으로 4·3을 규정했다. 

제주도민의 수난사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맞선 정의로운 사건으로 둔갑한 셈이다.

현 교수는 재작년부터 자신이 발행인으로 있는 계간지 '본질과 현상'에서 노무현 정부의 '4·3사건 보고서'의 문제를 지적해왔다. 

'4·3 보고서'가 정치적 입맛에 따라 진실을 왜곡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제주 4·3 단체 등에선 "4·3사건을 폄훼한다"며 입에 담을 수 없는 모욕적인 언어로 그를 매도했다. 현 교수는 물론 

4·3의 진실 밝히기를 그만둘 생각이 없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대체 뭐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이런 얘기도 들려줬다. 폭도가 마을을 습격한 날 고모 둘도 외양간에 숨었다가 한 폭도와 맞닥뜨렸다. 

그 청년은 "여기 아무도 없으니 어서 가자"며 나가버렸다. 고모들은 무사했다. 

할아버지가 누구였는지 물었다. 

둘째 고모는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말할 수 없다"고 버텼다. 

30년 후 고모는 현 교수에게 그 사람 이름을 말해줬다. 이미 세상을 뜬 같은 마을 청년이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인데도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모른 척하는 것이 상책(上策)이라고 생각되어서…."


평범한 여자도 아는 4·3사건의 진실을 권력과 이념에 취한 역사학자들만 제대로 못 보고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