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는 오랜 역사를 가진 천년 고찰 법원사(法源寺)가 있다. 고구려 원정에서 실패하고 눈에 양만춘의 화살을 맞고 회군하던 당 태종이 유주(幽州 지금의 베이징 지역)를 지나게 되자 병사와 말이 한발도 움직이지 않았다.
태종은 군대를 쉬게 하고 그곳에 절을 지어 전쟁에서 희생된 영혼을 위로하였다. 절 이름도 국가에 대한 충성을 기린다는 의미로 민충사(憫忠寺)라고 하였다. 645년으로 당 태종이 죽기 4년 전의 일이다. 이 사찰이 청(淸)대에 법원사로 바뀌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필자가 베이징 대사관 근무 시 법원사를 찾은 적이 있다. 법원사에서 당 태종이 세웠다는 비석을 발견하고 비문을 읽어 보았다.
첫줄에 당 태종이 “정고려(征高麗)할 때”라는 구절이 나온다. 정고구려(고구려 정복)가 아니고 “정고려”라는 비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뭔가 역사를 잘 못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의 나라 이름은 고구려가 아니고 고려였다는 말인가. 흔히 시대극에서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복하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러나 당 태종의 입에서 나온 나라 이름은 고구려가 아니고 고려였다는 것이다.
귀국하여 충주의 중원 고구려비를 찾았다. 장수왕이 한반도 남쪽의 국경을 표시하기 위해 세웠다는 중원 고구려비의 비문이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중원 고구려비에도 장수왕이 자신을 ‘고구려대왕’이 아니고 ‘고려대왕’으로 기술하고 있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고구려는 제20대 장수왕(본명高巨連) 때 국호를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꾸었다고 한다. 장수왕은 39세에 요절한 정복왕 광개토대왕의 맏아들로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아버지가 이룩한 북방의 넒은 영토에 추가하여 한반도 남쪽 지금의 충청도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장수왕은 국토를 크게 넓히고 관리한 영웅적 치세와 함께 100세 인생을 구가하여 98세까지 생존하였다. 사후 장수왕이라는 시호를 받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19세에 등극하여 죽을 때까지 79년간의 재위기간도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다.
베이징의 교외에는 고려영(高麗營)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름만 남아 있고 과거의 흔적은 없다. 중국의 지인에게 물어 보면 수 양제가 고구려 정벌을 위해 운하를 이용 군수물자를 옮겨 놓은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지인들은 나라 잃은 고구려 유민의 집단 거주지였다고 설명한다. 고구려가 망할 무렵의 나라 이름이 고려였기에 고려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도쿄의 인근 사이타마(埼玉)현에도 고마군(高麗郡)이 있다. 일본 대사관 근무 시절 자주 찾았던 고마군이 얼마 전 1300 주년을 맞아 큰 행사를 치루었다고 한다.
고구려 마지막 왕 보장왕의 아들 약광(若光)이 일본에 사절로 왔다가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에 그대로 주저앉는다. 약광이 데리고 온 호신용 고구려의 개(삽살개 일종)도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남았다. 지금 일본의 신사(神社)등에 보이는 고마이누(高麗犬)가 그것이다.
그 후 동해를 건너 내려 온 고구려 유민이 늘어나자 일본 조정은 그들의 조국 고려(일본 발음으로 고마)의 이름으로 군(郡)을 만들어 모여 살게 하고 스스로 통치하도록 하였다. 당시 고려군은 수도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다. 약광은 조상신을 모시는 신사를 만들었다. 지금 히다카(日高)시의 고마신사(高麗神社)이다. 이 신사에서 기도하면 입신출세가 잘 된다고 소문이 나서 일본의 관료들이 많이 찾는 다고 한다.
우리는 고구려라고 하지만 그들이 남긴 지명은 모두 ‘고려(高麗)’이다. 당시 국가의 이름이 고려였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왕건이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려’라고 답습한 것은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한 고려(고구려)를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고구려가 고려로 국명이 바뀌었는데도 고구려 본기에서 고구려라고 그대로 기술하였다. 김부식은 자신의 나라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중국의 고대 국가 상(商)의 경우 20대왕 반경에 의해 은(殷)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은(殷)나라로 불리었다. 중국 역사서에는 상(商)고 함께 은(殷)도 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이름의 영문표기 코리아(Corea Korea)는 왕건이 세운 고려와 무역한 사라센 상인들에 의해 서방에 전해진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다.
고구려가 패망된 지 100년 후 고구려 유민이던 고선지 장군이 당나라에 의해 중용된다. 그는 자신을 고려인으로 소개했다. 고선지 장군은 탈레스 전투에서 당군(唐軍)을 지휘 중앙아시아인과 싸운다.
당시 탈레스 전투에서 싸운 중앙아시아인은 고선지 장군을 통해 용맹한 고려인(Korea)을 알았다. 코리아는 고선지 장군과 싸운 중앙아시아인을 통해 서방세계에 전파된 것이다.
우리의 코리아는 왕건의 고려가 아니고 한반도 절반과 흥안령 이남을 국토로 한 대제국 고구려(고려)를 의미한다. 언제든 거란의 손소녕 같은 인물이 나타나 우리 코리아가 왕건의 고려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희 장군처럼 코리아가 고선지 장군의 고려임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려(고구려) 유민은 중국에서는 나라 없는 민족이었다. 그래서 업신여김을 많이 받았는지 모른다. 동북3성에 주로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은 “까오리빵즈(高麗棒子)”라고 불리면서 멸시를 받았다고 한다. 고려(고구려)유민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중국의 우리 동포들은 ‘까오리빵즈’가 싫어 고려인 보다 조선족으로 불리기를 좋아 했다고 한다.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동포들은 현지 사람들의 고려에 대한 나쁜 선입감이 없어서인지 고려인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역사 드라마 등에서 고구려와 고려를 구분하기 위해서인지 계속 고구려라고 부르고 있다. 역사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고구려 후반부를 설명할 때 반드시 고구려로 고집할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고려를 ‘전(前)고려’ 왕건의 고려를 ‘후(後)고려’ 등으로 구분해 사용하면 좋겠다. 이성계가 세운 조선도 고조선(최초의 고대국가)과 구분하여 ‘근세조선’ 또는 ’이씨조선‘으로 표기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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