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은 바다 건너 중국의 요서 지역에도 군대를 보내 지배했다고 알려졌다. 중국의 정사인 송서(宋書)에는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해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를 차지했다. 백제가 다스리는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양서(梁書)에는 "진나라 때 (고)구려가 이윽고 요동을 공략해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진평 2군 땅을 점거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송서와 양서의 이런 기록을 두고 조선 후기부터 논쟁이 일었다. 18세기 역사학자 신경준은 백제가 바다 건너편 영토를 경영한 일이 우리나라 역사책에서 빠졌다고 긍정론을 폈지만 안정복과 정약용은 부여의 역사를 중국 사람들이 백제 역사로 착각한 것이라고 하였다. 19세기 역사학자 한진서는 사리에 맞지 않는 기록이며 착오라고 부정론을 펼쳤다.
宋書·梁書 "백제가 요서 차지"
조선 후기부터 긍정·부정 논쟁
1974년부터 국사교과서에 수록
'백제 해상활동 자취' 해석 부상
일제강점기에 일본 학자들은 대개 부정론을 견지하였다. 반면 신채호·정인보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고려와 백제는 전성 시기에 강한 군사가 100만이어서 남쪽으로 오·월을 침범하고 북쪽으로 유주와 연·제·노를 어지럽혔다"는 최치원의 편지 글과 "백제의 침략을 받고 부여가 서쪽으로 이동했다가 전연에 망했다"는 자치통감 기록을 제시하며 이른바 '요서(遼西·요하 서쪽)경략설'을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은 광복 이후에 받아들여져 1974년부터 중·고교 국정 국사 교과서에서 '백제의 해외 진출'이 역사적 사실로 서술되기 시작했다.
논쟁은 1990년대 후반부터 다시 불붙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긍정·부정을 가르는 수준이었지만 논쟁이 치열해지면서 부정론과 긍정론 모두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그런 기록이 생겨났는지 구체적으로 논증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부정론은 313년 대동강 유역의 낙랑군이 멸망하자 일부 세력이 요서 지역으로 건너가 낙랑교군(僑郡)을 세운 것과 관련 있다는 견해, 후연(後燕)의 부여 유민 여암(餘巖)이 385년 7월 요서 지역에서 독립한 반란 사건을 중국 남조(南朝)의 사관들이 착각했다는 견해 등을 제시하였다. 긍정론은 기존 군사적 진출을 강조하는 해석뿐 아니라 4세기 중엽부터 5세기 초까지 요서 지역에 백제의 상업 기지가 있었다는 견해, 385년 6월부터 5개월간 백제가 요서의 여암과 연합하며 그 지역을 지배했다는 견해, 근초고왕 재위 후반기에 백제가 요서 지역의 부여계 유민들과 연계하며 해상 교역 주도권을 장악한 것을 그렇게 표현했다는 견해 등이 나왔다. 그리하여 2009년 한국사 검정 교과서의 집필 기준은 '해석에 논란이 적지 않다는 점에 유의하며 설명하도록' 했다.
결론은 아직 나지 않았다. 하지만 요서경략설을 논증하려면 먼저 밝혀야 할 것이 있음이 드러났다. 4세기 무렵 백제 인구와 군사는 얼마나 됐는지, 당시 요서 지역 상황은 어떠했는지, 백제와 요서 지역을 잇는 바다 교통로는 어땠으며 백제 선박에는 몇 명이나 탈 수 있었는지 등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백제 군사가 대대적으로 요서 지역에 진출해서 오랜 기간 통치했다는 증거를 찾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그 대신 근초고왕 때 백제가 황해도 지역을 차지한 뒤 요서 지역의 낙랑교군과 연계하며 함께 해상 활동을 활발히 한 발자취가 송서와 양직공도(梁職貢圖) 등에 여러 각도로 남게 되었다는 해석이 힘을 얻고 있다.
공동 기획: 한국고대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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