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쿠빌라이 칸의 원(元) 황궁 터는 바로 자금성"

바람아님 2016. 6. 11. 00:20
연합뉴스 2016.06.09. 16:26

세계를 호령하던 원(元) 대제국을 '통치'했던 쿠빌라이 칸(1215∼1294년)의 황궁 터가 어디였는지는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역사 기록을 보면 14세기 쿠빌라이를 이은 마지막 지배자 토곤테무르 칸 시기에 내분이 일어난 상황에서 명나라 세력의 공격을 받아 베이징에 있던 원나라 황궁이 사라졌다고 쓰여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명나라 군인들이 원나라 황궁 터를 흔적조차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짓밟았고, 자금성을 짓기 위해 원나라 황궁을 헐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명나라 시기 건축된 자금성 지층에서 원나라 황궁 터 지층 확인하는 모습(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캡처 사진)
명나라 시기 건축된 자금성 지층에서 원나라 황궁 터 지층 확인하는 모습(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캡처 사진)
연합뉴스 자료
연합뉴스 자료

자금성은 명나라 시기인 1천406년 건설이 시작돼 14년간 공사 끝에 완성됐다. 명에 이어 청나라 때까지 황궁으로 사용됐다.

이런 가운데 최근 중국 고고학자들의 연구로, 원나라 전성기의 쿠빌라이 칸이 거주했던 황궁 터가 현재 베이징(北京)의 자금성(紫禁城)일 것으로 추정됐다고 홍콩 영자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9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달 자금성 터의 지하 전기·소방 시설을 개선하는 공사 과정에서, 전문가들에 의해 자금성 터 아래 지층이 원나라 황궁 터인 것으로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해당 지층을 대상으로 고고학적인 시기를 조사한 결과, 명나라 시기 조성된 터 아랫부분이 원나라 때 다진 황궁 터인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베이징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의 왕광야오(王光堯) 부원장은 "고궁(자금성) 중앙의 서쪽 부분의 지층이 원나라 시기의 수도 4곳 가운데 하나인 허베이(河北) 성 장자커우(張家口) 소재 중두(中都) 유적과 같은 양식"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 고고학자들은 지금까지 발견된 증거로 볼 때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 황궁 터가 자금성과 동일한 장소일 것으로 추정하면서도, 완전히 겹친다고 하기에는 아직 섣부르다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다고 SCMP는 전했다.


왕 부원장은 "적어도 현재 알 수 있는 것은 쿠빌라이 칸의 황궁 터가 다른 곳이 아닌 여기(자금성)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쿠빌라이 칸은 칭기즈 칸의 둘째 아들 우구데이, 그 아들 구육, 넷째 아들인 톨루이의 맏아들 뭉케에 이어 다섯 번째로 권좌에 올라 도읍을 베이징으로 옮기고 1271년 국호를 원이라고 정했다. 이전이 몽골 제국이었다면, 원이라는 공식적인 국호가 쓰인 것은 쿠빌라이 칸 때부터다.


동아시아·중앙아시아 전문가인 모리스 로사비의 저서 '수성의 전략가 쿠빌라이 칸'을 보면, 쿠빌라이는 칭기즈 칸의 넷째 아들의 둘째로 태어난 출생 배경 탓에 처음부터 권력의 핵심으로 주목받지 못했으나 기다림·포용·소통·통합의 리더십으로 몽골제국 전성기를 이뤘다.

쿠빌라이 칸은 자신과 다른 민족이거나 다른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차별하지 않았다. 통치에 도움이 된다면 몽골인뿐 아니라 중앙아시아인, 중국인, 위구르인, 티베트인 등을 모두 기용했다.


소통 시스템을 마련해 참모들의 거슬린 소리도 처벌하지 않는 등 민족, 종교, 지역을 뛰어넘는 포용과 통합의 지도력을 발휘했다. 이런 기조는 몽골 제국 최고의 경제부흥은 물론 군사적인 강성대국을 이끌었다. 칭기즈 칸이 유라시아를 '정복했다'면 쿠빌라이 칸은 유라시아를 '다스렸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러나 쿠빌라이 칸의 '빛나는' 제국 통치는 중국에서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사실 한(漢)족 중심인 중국에선 이민족인 몽골족이 주축인 원나라의 역사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며, 원나라 황궁 터에 대한 고증이 미진한 것도 이런 분위기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