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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삼조원로 三朝元老' 장정옥 '꿈에서조차 1인자를 험담하지 말라'

바람아님 2016. 6. 20. 00:08
시티라이프 2016.06.09. 16:00

청나라는 정치, 군사 권력을 제외한 모든 관직을 한족에게 개방했다. 이 탁월한 선택의 통치술로 청나라는 130여 년간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강희, 옹정, 건륭, 3명의 황제는 명석했고 또 헌신적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이때 무려 50여 년간 이 3명의 황제를 보필한 재상이 있다. 바로 장정옥이다. 특이하게도 그는 한족 출신이다. 그는 살아서는 권력의 중심에 진출했고, 죽어서는 옹정제의 태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얻었다. 이것은 장정옥의 ‘현명하고, 분수를 지킬 줄 아는 처세학’ 덕분이었다.

▶황제의 생각을 논리로 정리한 권력 복심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중원을 차지한 청나라는 270여 년간 중국을 지배했다. 청나라는 중화사상의 한족을 억압 대상이 아닌 동반자로 여겼다. 동시에 청 왕조를 부정하거나 한족 왕조를 부활하려는 시도는 철저히 탄압했다. 청나라의 전성시대인 ‘강건성세 康乾盛世’ 130년의 지속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의 탁월한 리더십도 한몫 했지만 한족 출신 사대부와 관리들의 열정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강희제는 한족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정치 쇼’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는 명 태조 주원장의 능과 공자묘에서 눈물을 짓는 모습을 보이며 한족 사대부의 닫힌 마음을 열었다. 강희제는 본격적으로 한족을 관리로 등용했다. 능력 있고 충성심이 증명된다면 출신을 가리지 않은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장정옥이다. 그는 아누히성 동성 출신으로 집안은 대대로 대학사를 지냈다. 한마디로 머리에 든 것이 많아 인근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오피니언 리더’였다. 장정옥의 아버지 장영 역시 대학사를 지냈다. 당시 대학사는 ‘재상급’의 대우를 받는 문관 고위직이었다. 장정옥은 1672년에 태어났다. 그는 28세인 1700년에 진사에 합격해 한림원 학사로 관직을 시작했다. 그는 강희제가 특별 관리한 한족 출신 중 선두그룹을 형성한 엘리트였다. 온화하고 근면한 성품의 장정옥은 특히 시문에 능했고 상관의 지시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능력이 출중했다고 한다.


장정옥은 출세 가도를 달린다. 다양한 관직을 두루 경험, 형부시랑까지 오른다. 강희제는 만주에서 창업해 팔기군으로 중원을 점령한 청나라의 정신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 군주이다. 그러면서도 여진족만의 인력과 능력으로는 드넓은 중원을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희제는 재위 60여 년 동안 최고 권력기관과 무력기관의 수장을 제외하고는 모든 관직에서 한족 출신을 중용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장정옥은 그런 면에서 강희제가 생각한 인재의 기준에 부합된 인물이었다.


장정옥이 재상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한 시점은 강희제를 이은 옹정제 때이다. 옹정제는 ‘일중독 황제’였다. 그는 하루에 4시간만 자면서 나머지 20시간은 국정을 관리하는데 할애한 군주였다. 옹정제는 장정옥을 총애, 하루 종일 그를 옆에 두었다.

장정옥의 주 업무는 옹정제의 구두 명령을 문장으로 지어 문서로 완성하는 일이었다. 일견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보이지만 이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우선 시문에 능해야 하고, 무엇보다 옹정제의 심중을 정확히 읽고 그것을 글로 표현해야 했다. 옹정제는 북경의 자금성에서 조정은 물론 지방에서 올라오는 모든 상소와 업무를 직접 관장했다. 해서 장정옥이 하루에 무려 90여 회나 옹정제의 지시를 문서화 했다는 기록도 있다. 옹정제는 자신의 지시를 붉은 글씨로 써서 내려 보내 이를 ‘주비유지 朱批諭旨’라 불렀다. 이 업무를 모두 장정옥이 담당한 것이다.


옹정제는 재위 13년 만에 급서했다. 당시 ‘옹정제의 얼굴에 있는 7개의 구멍에서 모두 피가 나왔다’라는 기록이 있어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는 젊은 황제였다. 그는 자신만의 제국을 운영하고 싶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대부터 권력을 이어온 원로 대신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부담스러웠다. 특히 조정에 당파를 형성한 장정옥과 악이태는 ‘언젠가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건륭제는 집요하게 장정옥을 제거하려 했지만 명분도, 흠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이것은 장정옥의 ‘생존본능’이었다. 장정옥은 이미 옹정제 즉위의 3대 공신 중 2명이 제거되고 자신만 살아남은 ‘무서운 경험’이 있었다. 건륭제를 모시며 장정옥은 온갖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이는 당시 장정옥과 악이태 두 세력을 제거하고 황권을 강화하려는 건륭제의 권력 재편 구도에 의한 면이 더 컸다.


징정옥의 마지막은 분명 ‘해피엔딩’이다. 3명의 황제를 모셨고, 50여 년의 관직생활 중에서 무려 22년을 재상으로 역임한 것도 대단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은 물론 가문도 보존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그의 능력, 근면, 성실, 충성심 등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꿈에서조차 1인자를 험담하지 말라’, ‘권력과 부, 한 번에 두 가지를 모두 얻지 말라’는 2인자에게 꼭 필요한 ‘현명한 처세학’을 한시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 처세학 1 | 일기장에조차 1인자의 험담을 남기지 말라

1735년 옹정제가 급서했다. 앓아누운 지 이틀 만에 갑자기 죽은 것이다. 정사에는 병으로 기록되지만 야사에는 독살 등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 하지만 옹정제의 죽음에 따른 혼란은 없었다. 옹정제가 미리 4째 아들 홍력을 후계자로 점찍었고 군기대신 장정옥, 악이태, 종친인 장친왕 윤록, 과친왕 윤례를 고명대신으로 임명해 자신의 후계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4명의 고명대신은 자금성 건청궁의 편액 뒤에서 옹정제의 유조를 꺼내 홍력이 다음 황제임을 선언했다. 바로 청나라 6대 황제 건륭제이다. 건륭제는 아버지는 물론 할아버지인 강희제가 특히 아낄 정도로 어려서부터 왕재(왕으로서의 자질)의 면모가 돋보였다. 강희제가 자신의 후계를 고민할 때 장정옥이 4황자인 윤진 즉 옹정제를 추천하면서 “4황자의 아들인 홍력의 능력도 감안해 태자를 정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간언할 정도였다.


즉위 초기 건륭제는 아버지의 라이벌이었던 숙부들을 사면하고 할아버지, 아버지를 보필한 원로대신들을 대접했다. 당시 조정은 여진족 출신의 악이태가 군부의 지지를, 장정옥은 한족 출신 관리와 사대부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건륭제는 자신의 친위 세력이 숙성될 때까지 이 두 세력을 인정했다. 물론 장정옥과 악이태의 물리적인 나이도 감안했다. 하지만 건륭제는 참을성 많고 아량이 넓은 황제가 아니었다. 조심스런 성품의 장정옥은 자신의 흠을 남기지 않았다. 건륭 10년, 장정옥의 부하가 황후의 제문을 작성하면서 글자를 잘못 표기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건륭제는 이 일로 장정옥을 크게 질책했다. 장정옥은 불안했다. 건륭제의 분노를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정옥은 ‘권력자의 신임을 잃으면 죽음이 기다린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장정옥은 건륭제에게 은퇴를 청했다. 그러나 건륭제는 허락지 않았다. 건륭제의 속내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냥은 못 보내주겠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황실과 조정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자’를 가까이 두고 감시하겠다는 마음이었다. 4년 뒤, 건륭제는 장정옥의 은퇴를 허락했다. 장정옥은 건륭제에게 감사의 글을 올리면서 자신이 죽으면 ‘옹정제의 태묘에 배향’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이것은 옹정제의 유언이기도 했다. 옹정제는 ‘내가 죽으면 내 태묘에 장정옥과 악이태를 같이 배향하라’는 유지를 남겼다. 건륭제는 불쾌했지만 아버지의 유언을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건륭제는 허락했다. 


이때 장정옥이 실수를 했다. 장정옥은 아들을 시켜 건륭제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건륭제는 대노했다. ‘감히 아들을 시켜 감사를 대신한다’는 것을 황제에 대한 불경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장정옥은 건륭제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3일 밤낮을 무릎을 꿇고 빌었다. 3대에 걸쳐 50여 년을 국가에 봉직한 80세 원로대신이 보일 행동은 아니었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건륭제는 장정옥의 작위를 박탈했다.


1년 뒤, 고향으로 내려갈 채비를 마친 장정옥의 발목을 잡는 일이 벌어졌다. 황제의 장남이 병으로 죽은 것이다. 황제의 장남은 개인적으로 장정옥의 제자이기도 했다. 장정옥은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건륭제에게 ‘지금 떠납니다’는 글을 올렸다. 건륭제는 대노했다. “태자의 상중인데 재상이었고 태자의 스승이었던 자가 개인적인 사정을 들어 떠난다니 이는 황실에 대한 불충이다.” 건륭제는 “장정옥은 옹정제의 태묘에 배향될 자격이 없다. 그가 선대 황제를 위한 한 일은 일개 비서의 업무였다”라며 화를 내고 역대 황제의 배향자 명단을 장정옥에게 보냈다. 이는 ‘네가 이들처럼 배향될 자격이 있느냐?’는 반문이었다. 모든 작위를 박탈당한 장정옥은 빈 몸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재상의 귀향은 금의환향으로 온 동네가 떠나갈 듯 환영잔치가 벌어졌어야 했겠지만 장정옥을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만큼 권력자의 의중은 중요한 것이다.

모진 고초를 겪고 고향에 내려온 장정옥의 불운은 멈추지 않았다. 장정옥의 둘째 아들의 장인인 어사 주전이 부정행위로 탄핵을 받았다. 건륭제는 주전이 장정옥과 사돈이고 또한 장정옥의 추천으로 관직에 오른 것을 알고 있었다. 건륭제는 집요했다. 그는 장정옥이 그동안 전대 황제에게 받은 모든 하사품을 압수했다. 그리고 흠차대신(황제의 특사) 덕보를 비밀리에 불렀다.

“이번에는 장정옥의 가산을 압수하라. 그러면서 모든 기록을 찾아라. 선대 황제는 물론 나를 비방하거나, 원망하는 글이 있는 지를 모조리 뒤져보아라. 단 한 줄이라도 나온다면 내가 용서치 않으리라.”


덕보는 무려 보름간 장정옥의 집을 뒤졌다. 서책, 문서, 기록물, 회고록 심지어 사사로운 메모나 일기장도 살펴보았다. 장정옥은 선비로서 회고록을 썼다. 조정의 일, 선대 황제의 일도 기록했지만 단 한줄, 단 한 글자도 선대 황제는 물론이고 자신을 그렇게 괴롭혔던 건륭제를 원망하거나 비방하는 글을 찾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덕보는 장정옥의 재산 목록을 검사해보니 값나가는 물건은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덕보는 이를 건륭제에게 보고했다. 조정의 대신들과 한족출신 사대부는 물론이고 민심도 ‘이번에는 황제가 원로대신에게 너무 무례했다’는 여론이 돌았다. 


건륭제는 장정옥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흠차대신이 너무 과했다”라고 얼버무렸다. 건륭제는 장정옥을 옹정제의 태묘에 배향시키라 명령을 내렸다. 건륭제가 심할 정도로 장정옥을 탄압한 것은 그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과 원로대신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황제의 권위를 세우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마디로 장정옥이 건륭제의 ‘시범 케이스’에 걸린 것이다.


장정옥에게 대한 건륭제의 공격은 수년에 걸쳐 무차별적이었다. 그럼에도 장정옥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청렴하고 검소한 성품도 한몫했지만 최고 권력자에 대한 비방과 원망의 흔적을 남기지 않아서가 크다. 장정옥인들 건륭제에게 그 수모를 당하면서 수치스런 마음에 원망스럽지 않았을까. 하지만 장정옥은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50년 관직생활을 통해 터득했다. 그래서 그는 물론 그의 가문도 보존할 수 있었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이 생긴다

직장생활, 특히 오너가 있는 직장에서 가장 주의할 점은 오너에 대한 평가를 ‘누군가’에게 ‘하는 짓’이다.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실수이다. 첫째, 직장인은 평가를 받는 자리이지 누구를, 특히 오너를 평가할 ‘권리’는 없다. 평가는 오너를 비롯한 상사가 하는 것이다. 물론 ‘없는 자리에서는 임금님 욕도 한다’고 했다. 여기서 포인트는 ‘없는 자리’에서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고 싶어 속이 터질 것 같으면 혼자 노래방에서 가서 노래 크게 틀어놓고 외치면 된다. 두 번째는 오너의 눈과 귀가 생각보다 많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너에게 ‘고자질’을 주업으로 삼는 아부꾼의 존재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일테면 오너의 성이 ‘박 씨’라면 박 이사, 박 부장 등에게만 신경을 쓰고 이 씨, 김 씨는 오너 일가와 관련이 없다는 섣부른 판단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큰 규모의 회사일수록 외가, 사돈, 이종, 고종, 친구 등 의외로 오너 일가와 연결 고리를 가진 직원이 많다. 그들은 주어진 업무 외에 본능적으로 오너와 그 일가에 대한 평판 관리에 예민한 특징이 있다. 일단 직장생활에서 오너는 물론이고 상사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다는 것은 언젠가 그 대가를 치른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직장은 일종의 포커판이다. ‘포커 페이스’의 매력과 장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어떤 카드를 들고 있는지를 직장 구성원에게 알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말이 많아 실수하는 것보다 과묵한 것이, 섣부른 용기보다는 치밀한 자기 관리가 직장생활에서 더욱 필요한 미덕이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뒤집어 생각하면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처세학 2 | 양 손에 들어오는 떡은 사양하라

강희제는 재위 60년 동안 35남 20녀의 자손을 두었다. 청나라 황실은 전통적으로 후계를 미리 정해놓지 않는 전통이 있다. 하지만 강희제는 나라의 틀을 갖춘 뒤 안정된 치세를 위해 장남을 황태자로 삼았다. 그런데 장남이 병으로 죽었다. 곧 둘째 아들 윤잉을 태자로 삼았지만 윤잉은 황태자로서의 자질을 의심받았다. 윤잉은 태자에서 폐위 당했다. 공석인 태자 자리를 놓고 그야말로 ‘왕자의 난’이 벌어졌다. 조정의 관리들은 각각 자신이 지지하는 황자를 중심으로 세력화했다. 윤잉의 황태자당, 윤시의 황장자당 그리고 4남인 윤진, 8황자당 등으로 좁혀졌다. 장정옥과 연갱요, 융과다는 넷째 윤진을 지지했다. 이들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으면 강희제는 자신의 사후 측근들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 왕섬, 마제, 장정옥 등 자신이 아끼던 신하들을 일부러 한직으로 좌천시킬 정도였다.


1722년 건륭제가 사망했다. 윤진은 황궁을 장악하고 창춘원에 다른 황자들을 감금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바로 옹정제이다. 옹정제는 자신의 형제들 중에서 위협 요소가 될 만한 황자들을 모조리 귀양 보냈다. 그리고 장정옥, 융과다, 연갱요 등 측근들에게 주요 부서를 맡겼다. 하지만 옹정제는 천성이 남을 믿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모든 일을 자신이 직접 처리했다. 대신들이 할 수 있는 일도 일일이 체크하고, 점검하고, 보고받고, 지시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국정을 돌보는데 쏟은 또 다른 이유가 이것이다.


옹정제는 군기처를 설립했는데 그 작업을 장정옥이 맡았다. 장정옥은 군기처의 설립 목적, 조직, 운영, 규약, 직제 등 모든 것을 만들었다. 군기처는 청나라 멸망 시까지 황제의 권력을 집행하는 최고 권력기관이 되었다. 장정옥은 대학사, 군기대신으로 일하며 호부상서, 이부상서, 한림원, 국사관 등의 업무를 겸직했다. 그러면서 옹정제의 바로 옆에서 비서같은 업무도 수행했다. 훗날 옹정제는 장정옥을 주종 관계를 떠나 유일한 친구 같은 존재로 여길 정도였다. 옹정제의 별명은 ‘냉면왕 冷面王’이었다. 


냉정하고, 이성적이며 배신을 용납지 않았다. 옹정제는 죄인을 다루는데도 “죄인이 자살할까봐 두려워 수사 강도를 늦추지 말라. 모든 수단과 방법을 통해 죄를 밝혀야 한다. 필요하면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라고 지시할 정도로 차가운 군주였다. 물론 장정옥에게만은 예외였다. 한번은 장정옥이 병에 걸렸다. 많은 일을 겸직하느라 병을 얻은 것이다. 그러자 옹정제가 대신들에게 “최근 들어 내가 팔이 아프다. 대학사 장정옥이 아프다고 한다. 이는 짐의 팔이 병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할 정도로 장정옥은 실질적인 옹정제의 오른팔이었다.


옹정제는 무서운 군주였다. 관리 왕사준이 지방관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임지로 내려가는데 군기 대신 장정옥이 찾아왔다.

“내가 그대의 업무를 도와줄 사람을 추천하고 싶다.” 왕사준은 장정옥이 추천한 사람을 시종으로 임명해 임지로 부임했다. 시종은 성실하게 왕사준을 도와 업무를 잘 처리했다. 무사히 지방관 임기를 마친 왕사준은 북경으로 가 옹정제에게 인사를 드릴 계획이었다. 그러자 시종이 갑자기 사임을 청하였다. 왕사준은 이유를 물었다.

“여기서의 제 역할은 끝났고 이제 마지막 임무만 남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왕 대감보다 먼저 황제에게 가 그동안 왕 대감의 업무내용을 황제에게 보고하는 일입니다.”


왕사준이 믿고 부렸던 시종은 바로 옹정제가 감시병으로 보낸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만큼 옹정제는 관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체크했다. 그러면서 그들의 부정을 방지하고, 한족의 부흥 음모를 파악해 황실에 대한 도전을 체크한 것이다. 이렇게 옹정제가 조정의 대신과 지방관들에게 파견한 감시병의 수가 무려 1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옹정제 즉위의 절대공신은 장정옥, 융과다, 연갱요 등 세 사람이었다. 옹정제는 이들의 공을 치하하고 권력과 부를 주었지만 이는 유한한 것이었다. 장정옥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럴수록 그는 더 성실하고, 겸손하게 옹정제를 보필했다. 장정옥의 큰아들 장약애가 과거에 응시했다. 시험생의 답안지를 살펴본 옹정제는 한 답안지가 마음에 들었다. 옹정제는 이 답의 주인공을 3등으로 결정했다. 그가 바로 장정옥의 아들이었다. 옹정제는 장정옥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장정옥이 옹정제를 찾았다.


“폐하, 이번에 제 자식에게 3등 급제를 내리신 것을 취소해 주십시오. 제가 조정의 대신인데 아들이 3등에 드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경의 마음은 알겠지만 이는 공정한 것이다.”

“아닙니다. 폐하, 제 자식은 아직 어립니다. 더 공부해 세상에 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천하에 인재는 많습니다. 3년에 한 번 보는 과거에 모든 사대부들이 급제를 원합니다. 재상의 아들이 3등이 된다면 천하의 선비들이 이를 수긍키 어렵습니다. 폐하께서 정 제 자식을 등용하시겠다면 등수를 낮추어 주시길 바랍니다.”


옹정제는 장정옥의 아들을 4등으로 뽑았다. 장정옥의 아들은 실력만으로도 급제를 할 수 있었지만 장정옥은 이를 거부한 것이다. 이는 양 손 모두에 떡을 쥐면 나중에 위급할 때 내려오는 ‘구원의 동아줄’을 잡을 수 없는 이치다. 그는 자식들에게 “권력이 있다고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되고 복이 있다고 전부 누려서도 안 된다. 항상 충성의 마음으로 검소하고 겸손해야 가문과 후손이 오래간다”고 일렀다.


옹정제의 3대 공신 중 융과다와 연갱요는 장정옥과는 달랐다. 그들은 권세와 부귀의 달콤함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곧 파멸로 연결되었다. 옹정제 즉위 후 융과다는 방심했다. 그는 옹정제의 이복동생 8황자 윤사와 접촉했다. 물론 반란을 획책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옹정제는 이를 용납지 않았다. 목숨을 건 ‘왕자의 난’을 치루고 황제가 된 그는 즉위하자마자 형, 동생 가리지 않고 경쟁자가 될 만한 모든 황자들을 귀양 보냈다. 이를 융과다가 잠시 잊은 것이다. 아니 방심이었다. ‘내 힘으로 황제를 세웠는데 그 공을 황제도 잊지 않을 것이다’였다. 그래서 더욱 옹정제는 융과다를 용서하지 않았다. 황제를 만만히 보는 행동을 묵과하지 않은 것이다. 융과다는 ‘황제 기만죄’로 체포되어 연금되었다. 융과다는 분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융과다에 비해 연갱요는 더욱 공이 많았다. 그는 이른바 여진족 정통이었고 군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그의 누이는 옹정제의 총애를 받는 후궁 연귀비였다. 옹정제 즉위 초 연갱요는 서북대장군으로 팔기군을 지휘해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환영식을 옹정제가 직접 열어주었다. 옹정제는 “연갱요 같은 장수가 10명만 있으면 천하를 다스리는데 무엇이 걱정이겠는가”라는 치하를 내렸다. 연갱오는 한껏 부풀었다. 그는 말을 타고 황궁까지 행군했다. 그러나 황제의 숙부가 나왔는데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옹정제가 직접 나오자 그제야 말에서 내려 고개로 인사를 했다. 옹정제는 연회를 열었다. 연갱오는 방심한 채 취했다. 술에 취하고 권력에 취한 것이다. “내가 일찍이 만 권의 책을 읽고 20세에 진사가 되었다. 이제 백만 대군을 지휘하는 장수가 되었다. 지금 황제는 내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주신다.” 옹정제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다음날, 팔기군 사열식이 벌어졌다. 옹정제가 참석했다. 병사 3000명이 중무장한 채 찌는 듯한 더위에 도열했다. 옹정제는 병사들이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워 “갑옷을 벗고 편하게 있어라” 명령했다. 병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옹정제는 다시 시종들에게 “병사들에게 갑옷을 벗으라 하고 얼음을 주어라” 명령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옹정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순간 연갱오가 “폐하의 명령이시니 갑옷을 벗고 쉬어라” 명령하자 병사들이 움직였다. 옹정제는 결심했다. 연갱오를 제거하기로. 1725년 어느 날, 해와 달이 동시에 떴다. 모든 대신들이 ‘이는 하늘의 길조’라고 옹정제를 축하했다. 연갱오도 축하 인사를 했다. 여기서 실수를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라는 문장을 ‘저녁부터 아침까지’라고 바꿔 쓴 것이다. 대단한 실수는 아니었다. 옹정제가 총애하는 장정옥이 만약 이런 실수를 했다면 “장정옥의 업무가 너무나 많아 그가 피로하구나”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노리고 있던 먹잇감 연갱오의 실수에 옹정제는 버럭 화를 냈다.


“장군,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려니 이런 실수가 나오는 것이오.”

이때라도 연갱오가 옹정제의 마음을 알아채고 납작 엎드려야 했지만 연갱오는 ‘설마’ 했다. 이즈음, 연갱오가 추천한 감숙성 순무 호기항이 무능하다고 채정이 탄핵하자 오히려 연갱오가 채정을 공격했다. 옹정제는 연갱오에 대한 공격 신호를 보냈다. 옹정제의 신호를 받은 대신들이 일제히 연갱오를 물어뜯자 그가 벌였던 모든 일들이 죄가 되어 돌아왔다. 연갱오는 기망죄, 대역죄, 참월죄 등 총 92개의 죄목을 받고 평민으로 강등되어 자살을 명받았다. 연갱오는 자살하고 그의 장남도 사형당하는 등 가문이 풍비박산 되었다. 옹정제의 무서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바로 연갱오의 누이이자 자신의 후비인 연귀비의 처리였다.

옹정제는 발표했다. “만약, 연귀비가 병으로 죽으면 예우를 올려 황귀비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하라.” 옹정제는 연귀비의 죽음을 예고한 것이다.


이렇게 철저한 자기관리와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 옹정제를 모시는 일은 그야말로 호랑이 입에 손을 넣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장정옥은 무려 13년 동안 옹정제 곁을 지켰다. 옹정제가 죽으면서 “내 태묘에 장정옥을 배향해라. 죽어서도 같이 있겠다”고 유언을 남길 정도로 장정옥은 옹정제에게 진심전력이었다. 머리를 낮추고, 겸손하고, 권세와 부귀를 동시에 탐하지 않은 그의 처세 덕분이다.


▷넘치는 꽃다발은 결국 바닥에 떨어진다

직장인에게 최고의 선물은 승진이다. 승진을 한다는 것은 능력을 인정받는 것이고 그에 따라 경제적인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지난 세대만 해도 시간이 지나면 승진을 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좋은 시절이었다. 지금은, 연차와 직급이 무너진 시대이다. 입사만 같이 했을 뿐이지 동기라고 과장, 차장, 부장으로 나란히 올라가지 않는다. 하루아침에 동기에게 ‘님’ 자를 붙여야 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승진만이 직장에서 최고의 성과이고 미덕일까? 슬픈 현실이지만 노조, 계급정년 등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으려고 ‘승진 거부권’을 요구하는 노조가 있을 정도로 승진을 반기기만 하는 분위기도 아니다.


자신은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다. 주어진 능력, 드러난 성과보다 과분한 칭찬과 보상을 받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런 일이 눈앞에 펼쳐진다면 일단 경계할 필요가 있다. 조심할 것은 내가 세운 공보다 많은 보상이다. 항상 모자란 듯한 보상을 회사에서, 상사에게 받는 것, 즉 ‘약간의 부채의식’을 그들에게 남겨놓은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연말 시상식에서 수상자에게 몰리는 꽃다발을 생각해보라. 한두 개 정도면 손에 들고 우아하게 소감을 말하지만 수십 개가 들이닥치면 결국 모두를 바닥에 내려놓아야 한다. 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의 보상과 칭찬을 받고, 그것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다음에 주어지는 보상도 받을 수 있는 길이다.


▶# 처세학 3 | 처세의 기본은 겸손과 분수를 지키는 것

장정옥은 소탈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 강희제, 무미건조하고 부지런하지만 냉혹한 옹정제, 풍류를 즐기면서 자기 과시욕이 있는 건륭제 등 3명의 황제에게 이른바 ‘맞춤형 처세학’을 선보였다. 강희제에게는 마음을 열고 배우고, 옹정제에게는 진심으로 봉사하고, 건륭제에게는 머리를 숙인 것이다. 장정옥이 3대 황제를 무려 50여 년간 모실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그의 능력, 처세가 노련했음도 한몫했지만 가장 기본으로 그의 겸손과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정옥에게 고향에서 편지가 왔다. 장정옥의 본가와 이웃집 간에 송사가 벌어진 것이다. ‘옆집과 석 자 정도의 땅을 놓고 소유권 분쟁이 벌어졌으니 재상께서 지방관에게 일러 잘 해결하라’고 일종의 압력을 행사 해달라는 관리인의 편지였다. 장정옥은 이 편지를 받고 답장으로 시 한 수를 써 보냈다.

‘천리 길 온 편지가 길과 담 때문이라니, 땅 석 자를 이웃에 양보하면 무슨 해가 있으랴. 만리장성은 남아 있건만, 그때의 진시황은 누가 볼 수 있는가’.


땅 석 자를 이웃집에 양보하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당시 장정옥의 권력이라면 그 땅은 장정옥이 차지할 수 있었지만 장정옥은 사사로운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관리인은 장정옥의 지시대로 땅 석 자를 양보했다. 그러자 이웃집도 장정옥의 넓은 마음을 따라 땅 석 자를 양보했다. 졸지에 6자 넓이의 골목이 생겨 마을 사람들은 그 길을 편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장정옥의 넓은 마음을 칭찬하며 그 길을 ‘육척 골목 六尺巷’이라 불렀다.


이처럼 장정옥은 항상 소박하고 분수를 지키는 마음을 잃지 않았기에 죽어서도 자신의 명예와 가문을 지킬 수 있었다. 물론 노년에 건륭제의 권력 강화를 위해 표적이 되기도 했지만 당시 권력 구도는 건륭제가 장정옥과 악이태, 모두를 제거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사실 장정옥은 여러 면에서 불리했다. 무엇보다 그는 한족 출신이었고 군부와 연결고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장정옥은 몇 번의 정치적 위기를 벗어나며 한족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청나라 황제의 태묘에 배향되는 영광을 얻었다. 사람들은 그를 ‘청나라 최고 전성기를 이끈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평가한다. 그는 한마디로 처세와 능력을 모두 겸비한 시대의 리더이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칼럼니스트) 사진 pixabay.com]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532호 (16.06.1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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