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살며 생각하며>鮑叔(포숙)의 '팔로어십'

바람아님 2016. 7. 22. 23:52
문화일보 2016.07.22. 14:10

김영수 중국 전문가

지난해 8월 한여름 어느 날, 중국 산둥(山東)성의 성도인 지난(濟南)의 날씨는 숨이 막힐 정도였다. 기온도 기온이지만 습기가 더 견디기 힘들었다. 춘추전국시대를 풍미했던 ‘제자백가(諸子百家)’로 일컬어지는 사상가들의 유적을 탐방하고 돌아가는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일행들을 시원한 박물관에 떨궈(?) 놓고 오랜 친구와 함께 택시를 잡아탔다. 지난 2700년 가까이 수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던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인 포숙(鮑叔)의 무덤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관포지교’는 단순히 관중(管仲)과 포숙의 우정 이야기가 아니다. 이 고사의 역사적 배경 등을 꼼꼼하게 살피면 한 나라를 이끄는 리더의 리더십을 비롯해 나라의 흥망을 좌우하는 인재의 문제 등 대단히 심각한 문제들과 직면하게 된다. 주(周) 왕실의 권위가 무너져가던 춘추시대 초기 동쪽 바닷가에 위치한 제(齊)나라의 리더 환공(桓公)은 관중과 포숙 등 기라성 같은 인재들을 기용해 수많은 제후국 중에서 가장 먼저 부민부국(富民富國)을 이뤄냄으로써 춘추시대 최초의 패주(覇主)로 우뚝 섰다.


이 과정에서 환공은 자신을 활로 쏘아 죽이려 했던 원수 관중을 재상으로 발탁하는 놀라운 리더십을 발휘했고, 관중은 자신을 알아준 환공과 제나라를 위해 40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부민부국이라는 대과업을 성취해냈다. 부민을 기본 철학으로 하는 관중의 정치와 정책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개혁이라는 위대한 여정에 이정표를 마련하는 쾌거를 이뤘다.(관중의 국정 철학과 경제사상 등을 집대성한 고전이 바로 ‘관자(管子)’이며, 이를 제자백가의 출발로 보는 전문가가 적지 않다.) 사마천(司馬遷)은 관중의 개혁 정치 덕분에 제나라가 그 후로도 수백 년 동안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는 높은 평가를 했다. 이것이 ‘관포지교’의 고사를 떠받치는 주된 내용이다.


이 두 사람의 고귀한 정신세계는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빛을 발한다. 40년 가까이 제나라 국정을 이끌면서 온 힘을 다했던 관중이 노환으로 쓰러졌다. 일어날 가망은 없어 보였다. 관중의 보필을 받으며 춘추시대 첫 패주로서 40년 가까이 떵떵거리며 살아왔던 환공은 당장 관중의 후임이 걱정이었다. 그만큼 관중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것이다. 병문안을 핑계로 관중을 찾은 환공은 넌지시 후임 문제를 꺼냈다.


당시 포숙은 건재했다. 환공도 내심 포숙을 관중의 후임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중신들 역시 같은 의중이었다. 누가 봐도 그것이 순리였고, 또 인지상정(人之常情)이었다. 관중이 40년 가까이 누려왔던 그 자리가 누구 덕이었던가? 그런데 놀랍게도 관중은 자신의 후임으로 포숙을 추천하지 않았다. 진짜 놀란 환공이 “포숙은?” 하고 반문할 정도였다. 관중은 “포숙은 위인이 군자라 온갖 일을 두루 원만하게 처리해야 할 재상 자리에는 맞지 않습니다” 하면서 대신 습붕(隰朋)을 추천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소인배 하나가 포숙에게 쪼르르 달려가 관중의 매정함을 지적하며 두 사람 사이를 이간질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포숙은 그 소인배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만 물러가시오. 이 포숙이 사람 하나는 잘 보았소. 내가 그렇게 하라고 관중을 그 자리에 추천했소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700년 전 관중과 포숙이 보여준 참으로 가슴 떨리는 ‘공사 분별’의 경지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 지도층 인사들의 찌들대로 찌든 탐욕과 사리사욕을 보노라면 이들의 공사 분별은 참으로 딴 세상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관포지교’의 진정한 주인공은 관중도 환공도 아닌 포숙이다. 사실 ‘관포지교’의 고사를 살피면서 필자가 정작 관심을 가진 대목은 관중의 화려한 정책과 활약이 아니다. 조용히, 드러나지 않게 관중을 도왔던 포숙이었다. 포숙은 관중을 포로로 압송해 사정없이 찢어 죽이려 했던 환공을 설득해 관중을 살려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에게 돌아올 재상 자리를 사심 없이, 여러모로 유능한 관중에게 양보하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결코 할 수 없는 고귀한 팔로어십(followership)을 실천했다.


관중은 이런 포숙의 양보 덕분에 목숨을 살리고 재상 자리를 40년이나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사마천은 “세상 사람들은 관중보다 포숙을 더 칭찬했다”는 세간의 평가와 관중이 죽기 전에 남긴 “날 낳아주신 분은 부모지만(生我者父母·생아자부모), 날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知我者鮑叔·지아자포숙)”는 말로 포숙의 위대하고 고귀한 정신세계를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역사는 참으로 냉정하다. 그 사람이 해놓은 것, 겉으로 드러나는 업적의 크기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 같다. 물론 사마천과 필자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포숙의 위대하고 고결한 정신을 높이 평가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하지만, 그것이 역사적 공간으로까지 배려받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이 때문에 필자는 일부러라도 포숙의 위대한 팔로어십을 부각시키려 애를 썼는지 모르겠다.

필자는 그리도 그리던 포숙의 정신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역사적 공간을 찾아 둘러보았다. 하지만 포숙의 위대한 정신세계를 느끼기보다는 그 정신세계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 허용되지 않은 현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새삼 위대한 인간은 공간의 크기가 아닌 시간의 무게가 더 중요하고, 그것을 어떻게 오늘에 되살려 세상을 좀 더 나은 쪽으로 이끌 것인가 하는 고민에 깊이를 더하여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