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가운데 일찍이 멀고 먼 여행을 떠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신라의 승려 혜초(慧超·704?~787?)이다. 그는 4년 동안 무려 5만리를 여행하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다. ‘천축국’은 인도를 가리키고 ‘오’는 동, 서, 남, 북, 중을 의미한다. 그는 배를 타고 중국 광주를 출발하여 동천축국에 상륙했다. 인도를 종횡으로 주유하고 아랍까지 갔다가 중앙아시아로 향했다. 거기서 파미르고원을 넘고 티베트를 건너 장안(長安)에 도착했다.
이것은 요즘에도 선뜻 나서기 어려운 대장정이다. 하물며 1300년 전에야 오죽했을까. 당시로서 그런 여정은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을 사모하지 않고는 도저히 나설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남천축국을 지나며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네”라고 읊조린다. 뜻을 단단히 세운 구도승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억누를 수 없었나 보다.
그의 놀라운 행적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가 1200년이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가 돈황석굴에서 다량의 고문서 뭉치를 약탈했다. 그중에는 앞뒤가 다 떨어져나가고 6000여자만 남은 두루마리도 있었다. 펠리오는 그 내용을 훑어보고 곧바로 두루마리의 주인공이 혜초임을 알아챘다. 그가 다른 고서(古書)를 통해 이미 ‘왕오천축국전’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혜초는 16세 무렵 당나라 광주로 간 것으로 보인다. 거기서 중국 밀종(密宗)의 시조(始祖)인 인도 출신 금강지(金剛智)를 만나 사사하다가, 20세부터 4년간 인도를 여행했다. 나중에 스승이 입적하자, 그의 뒤를 이은 불공(不空)의 문하가 되었다. 불공은 일가(一家)를 이룬 자신의 제자가 여섯 명이라는 유서(遺書)를 남겼다. 그 여섯 명 중에 두 번째로 ‘신라의 혜초’라는 이름이 거명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혜초가 신라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들른 나라마다 짤막한 여행기를 남겼다. 각 나라에 대해 분량은 다르지만 대체로 출발지에서 목적지로 가는 방향과 소요시간, 왕성의 위치와 규모, 통치상황, 대외관계, 기후와 지형, 특산물과 음식, 의상과 풍습, 언어, 종교, 특히 불교의 성행 정도 등을 간략하게 적었다. 낡은 두루마리에 기록이 남겨진 나라나 지역만 해도 무려 40여곳에 달한다. 앞뒤로 떨어져나간 부분에는 어떤 이야기가 적혀 있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근세에 이르러 또 한 명의 흥미진진한 여행자를 만난다. 18세기 조선은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 연호를 고집했다. 그런 이상한 나라에서 40대 중반까지 벼슬도 못하고 친구들과 몰려다니기나 하며 좀더 나은 세상을 동경하던 불우한 지식인이 있었다. 바로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다.
1780년 봄, 그의 8촌형 박명원(朴明源)이 청나라 건륭제의 만수절(70세 생일) 축하사절단 단장으로 뽑혔다. 연암은 박명원의 배려로 단장의 개인 수행원 자격을 얻어 사절단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것은 마흔네 살이나 된 무관(無冠)의 선비에게 천재일우(千載一遇)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 굶주린 듯 흡수할 채비가 되어 있었다.
실제로 그는 여행 중의 경험, 관찰, 토론, 감상 등을 열정적으로 기록하여 무려 26권 10책에 달하는 두툼한 일기를 남겼다. 그것이 바로 ‘열하일기’(熱河日記·1783?)이다. 이 일기는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요동, 산해관을 거쳐 북경에 도착한 다음, 거기서 열하로 갔다가 8월 20일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기까지 꼬박 두 달간의 여정을 담고 있다.
마침 장마와 무더위가 극성인 한여름이었다. 일행은 8월 1일 북경에 도착하여 기진맥진 쓰러졌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황제는 북경에 없었다. 그가 700리나 떨어진 열하(熱河)에 머물고 있으니 그리로 오라는 것이다. 하인들은 엉엉 울기까지 했다. 당시의 여행이 얼마나 고단했는지 짐작이 간다. 사절단은 300여명 중에 70명 정도만 추려 열하로 발길을 재촉했다. 드디어 황제를 알현하고 며칠 머물다가 북경으로 돌아왔다.
연암은 청나라의 일상과 문물을 꼼꼼하게 관찰했다. 벽돌, 기와, 수레, 방고래 등을 관찰하고 그 효용성을 논하기도 했다. 이런 사례는 그가 당시의 평균적 사대부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의 말이나 글이나 행동에서 주자학의 규범이나 격식 따위는 손톱만큼도 발견할 수 없다. 그는 오로지 실용적인 시각에서 낯선 문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다.
그는 가는 곳마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 유쾌하게 교류했다. 저잣거리의 상인은 물론, 열하나 북경에서 만난 지식인들과 필담(筆談)을 통해 다양한 주제를 놓고 대화를 나눴다. 또한 흥미 있는 내용을 발견하면 즉석에서 바로 베껴 적었다. ‘호질(虎叱)’도 그렇게 얻은 소득 중의 하나이다. 그는 어디서나 호방하고 자유롭고 위트 넘치는 모습을 잃지 않았다.
이 여행기로 그는 당대의 스타작가로 떠올랐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사람들이 무엇에 목말라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정조(正祖)는 그의 문체가 순정(醇正)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질책했다. 그의 자유분방한 사유를 ‘순정한’ 문체에 가두기란 불가능한 노릇이었다. 글의 격식을 강요한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이야말로 시대착오적 반동이 아닐 수 없다.
혜초와 연암. 그들은 전혀 다른 시대를 살며, 전혀 다른 지향을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멀고 먼 여행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똑같다. 그들이야말로 일찍이 낯선 세계와 적극적으로 소통을 시도한 선구적 세계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혜초가 영혼을 살려낼 도를 찾아 구도(求道)의 여행을 떠났다면, 연암은 세상을 살려낼 방책을 찾아 구세(求世)의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빈번하게 여행을 한다. 그러나 삶이 그러하듯이 여행도 자꾸 가벼워지고 있다. 구도나 구세는 아닐지라도 원초적 호기심마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제는 여행이 아예 휴식이나 여흥으로 바뀌고 있다. 바야흐로 휴가철이다. ‘왕오천축국전’이나 ‘열하일기’를 통해 새삼 여행의 무게를 느껴봄은 어떨까. 그것이 곧 인생의 무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