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러운 나뭇잎도 집어삼킬 듯한 삼복더위에 비무장지대가 생각난 건 젊은 시절 목격했던
장엄한 풍경 때문이었을 거다. 장교 임관 후 견학차 갔던 전방 철책에 마침 비가 내려 남북을 가르는
협곡엔 안개가 자욱했다.
운무 사이로 간간이 얼굴을 드러낸 북녘 산 정상에 가끔 백마 탄 여자 인민군 사령관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북한 전투기가 산 중턱 어딘가로 착륙하는 광경을 봤다는 병사도 있었다.
포성이 멈춘 뒤 비무장지대는 작위적 인간과 결별하고 원시의 시간 쪽으로 흘러갔다.
야생동물과 야생화가 생성과 소멸을 반복했다. 그날 신참 장교의 어깨에 내려앉았던 운무는
힘과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적의(敵意)를 생산하는 인류종(種)의 우매함에 대한 위로였다.
밤마다 링거를 맞으며 버티던 철책 부대의 그 소대장은 어디선가 노년을 맞고 있을 터이다.
밤마다 링거를 맞으며 버티던 철책 부대의 그 소대장은 어디선가 노년을 맞고 있을 터이다.
앳된 얼굴의 전방 소총수는 장성한 아들을 다시 전방에 보냈을 것이다.
전방 근무의 기억이 까마득해진 아버지와 다시 철책 방어에 임하는 아들은 비무장지대가 인류에게 건네준 소중한 교훈을
어떻게 되새기고 있을까. 1953년 7월 휴전협정으로 설치된 비무장지대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현 전투 지점에서 2㎞를 물러나라, 접촉거리를 멀리 띄우면 전쟁 가능성이 줄어든다! 키프로스와 베를린에 장벽이 쳐지긴
했지만, 이렇게 넓은 무장해제 지역을 설정한 건 인류 역사상 최초였다.
멀리 떨어져 앉아 평화를 강구하라는 뜻이었다.
탱크와 기관총, 육박전이 승패를 갈랐던 지상전의 시대, 위력적인 공중전도 비행거리에 제약을 받았던 그 시대에
비무장지대는 전쟁방지를 위한 최고의 지략이었다. 그런데 당시 휴전협정에 임했던 군사 전략가들도 몇 십 년 후
비무장지대의 인류사적 의미를 휴지통에 쑤셔 넣은 사이버전쟁 시대가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혈맹인 미국과의 신뢰를 고려하면 사이버 전쟁의 총아 사드의 한반도 배치 결단을 되돌리기는 어렵다.
혈맹인 미국과의 신뢰를 고려하면 사이버 전쟁의 총아 사드의 한반도 배치 결단을 되돌리기는 어렵다.
물밑에서 어떤 외교적 밀담이 오갔는지는 몰라도 국가안보회의(NSC) 의장인 통수권자가 결정했으니 뒤집을 출구는 막혔다.
국회도 어리둥절한 판이고, 국민의 의구심과 불만은 뭉게구름처럼 피어난다.
정부 당국자는 왜 갑작스레 선회했을까?
2년 동안 감췄다가 왜 느닷없이 결론을 내렸을까,
이후 8일 만에 왜 성주가 낙착됐는지, 논의 과정은 어떠했는지 따져 물어야 한다.
한반도 운명에 관련된 사드에 관여하면 각성한 시민인가, 불순 세력인가?
그걸 걱정하는 국민은 외부 세력인가?
부정적 여론에 신경이 쓰였는지 며칠 전 대통령은
‘더 좋은 대안이 있으면 달라’고 하소연했다.
순서가 바뀌었다.
미리 그걸 물었어야 했다.
어느 신문은 ‘외교가 없었다’고 비난했다.
막후교섭을 안 했을 리 없다.
사드 결단은 힘겨운 외교 끝에 도달한 결론이었을 거다.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가? 안보와 외교는 일란성 쌍생아다.
분단체제에서는 더욱 분리 불가다.
그렇기에 한·미 ‘군사동맹’을 살리려고
한·중 ‘역사동맹’을 희생시켜야만 했던 저간의 고뇌와 원칙을
솔직히 밝혀야 한다. 사드를 손에 쥔 채 중국과 교섭하는 게 오히려
당당하다는 주장도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중국이 아예 돌아서면 북핵 문제는 더 난망이다.
다른 논리는 없었을까?
다른 논리는 없었을까?
국경과 거리 제약을 사뿐히 넘는 첨단미사일이 비무장지대의 반전(反戰)철학을 일소한다 해도 무기경쟁에 휩쓸린
이 시대의 광기(狂氣)를 조금이라도 순화시킬 한국의 독자논리는 없을까?
북한 김정은이 핵 불장난을 즐기는 판에 무슨 한가한 소리인가 싶겠지만,
세계 무력의 40%가 집중된 한반도에 첨단무기를 속속 도입하면 끝내 폭발할지 모른다.
사드 도입은 20세기 지상전 논리를 21세기 사이버전쟁에 그대로 적용한 결과다.
국회 긴급질의를 보면 사드의 북핵 억제 효과를 확신하지 못하는 의원들이 다수라는 현실이 놀랍다.
국회 긴급질의를 보면 사드의 북핵 억제 효과를 확신하지 못하는 의원들이 다수라는 현실이 놀랍다.
하물며 일반 국민은 어떠랴.
패트리엇과 사드의 다중 방어망이 만주와 연안지역에 촘촘히 배치된 둥펑미사일, 북한의 대포동, 노동미사일을
보기 좋게 요격해도 핵무장과 사이버전쟁의 야만적 행진을 저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중국을 둘러싼 미사일방어망에 한국을 편입하고 세계 최고의 중무장지대로 격상시키는 미국의 세계 전략이 한국에 이로운가,
아니면 해로운가? 논쟁은 합의점을 찾지 못한다.
미국에의 귀의가 일단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는 하더라도 전쟁방지나 영구평화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중동에서 포화가 사라지면 다음은 중무장 지역인 한반도일 거다.
중동에는 비무장지대가 없다. 한국에는 있다.
저 가공할 사이버 무기들이 비무장지대의 인본주의적 의미를 무효화해도 비무장지대 발상이야말로 평화 공존의 지혜를
끈질기게 묻는다. ‘무장평화’가 전쟁으로 가는 길이라면 ‘비무장평화’만큼 인류를 구제할 지혜로운 철학이 없음을 말이다.
공상(空想)이 항상 부질없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