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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권익위 오랏줄에 묶인 ‘창조한국’

바람아님 2016. 10. 6. 23:53
[중앙일보] 입력 2016.10.03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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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법) 시행 7일째, 한국인은 단군 이래 최고 속도로 구태를 벗어던졌다. 상식적 질서가 도래했다. 흥겹고 유쾌하다. 가중된 자기 검열과 감시는 가치 있는 시련이다. 상층부의 암거래를 응징하라는 서민의 정당한 요구가 일으킨 지진은 이제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부패 고리가 끊어질 것이다. 그런데 환호하는 시민들도 4대 직업군에 씌운 올가미가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기업인과 자영업자도 학교, 주민센터 위원회 등에 적을 두면 공무수행사인(私人)이 돼 즉각 법 적용 대상이다.

청렴 사회는 시대적 과제다. 부패를 번성시킨 주역들은 오랏줄을 받아 마땅하다. 감시와 처벌 수위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높인 이유인데 그 비용을 누가 치를 것인지는 따져 보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서민, 그들이다. 4대 직업군 400만 명, 그만큼의 배우자, 공직 유관기관, 각종 위원회 위원들, 대기업 홍보·영업 담당자를 합하면 대략 1000만 명에 달한다. 우선 회식과 모임이 사라졌다. 의심받을 만남도 줄었다. 대기업은 단체 후원, 사회공헌 활동을 거둬들였다. 공익재단은 장학·연수사업에 비상이 걸렸다. 사회학에서 말하는 2차 관계망이 요동친다. 서비스업과 음식·숙박업이 번성하는 곳이자 서민들의 생계 터전이 바로 이곳이다.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음식·숙박업 10곳 중 5곳은 1년 내에 폐업했는데, 특히 중고급 식당의 파산이 상승할 것이다. 싼 음식만 먹는다면 환영할 일이다. 점주는 물론 종업원·납품업자·식자재 생산 농어민·화훼업자·운송기사들이 희생된다. 10조원이 증발된다는 추산이다.

공화주의는 법 규제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이념이다. 감시와 처벌 비용은 흔히 국민 몫으로 전가된다. 성숙한 공화주의라면 표적이 좁고 처벌 기준이 명확하다. 파급 효과를 노린다. 김영란법은 ‘직무 관련성’이란 모호한 기준에다 국민 전체가 대상이다. 대법원장도 헷갈리고 그 법을 작성한 당사자도 헷갈린다. 법조인들은 ‘판례’를 기다린다고 했다. 선량한 국민이 법망에 걸려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헌법재판소도 그런 점에서 동일하다. 그래도 정의가 실현된다면 찬성이다. 사회 약자에게 최대 혜택을 주는 것이 사회정의라고 존 롤스(J. Rawls)가 말했다. 김영란법은 윗물 맑기 비용을 불특정 다수, 특히 아랫물에 전가하는 방식이다. 롤스에 따르면 부정(injustic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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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연희 강남구청장이 시범 케이스로 걸렸다. 보도에 의하면 대한노인회 강남지부가 해왔던 일을 구청이 주관하자 주도권 다툼이 일어난 것으로 들린다. 구의회 결재사업이라도 정적(政敵), 혹은 앙심을 품은 자의 고소를 피할 수 없다면 일손을 놓는 게 상책이다. 지자체 대민사업은 일단 축소될 것이다. 공무원은 위험 부담이 가득 찬 현장 행정을 버린다. 복지안동이 최고의 생존 원칙, 100만 공무원이 절차와 규정만을 따지면 대한민국은 결빙된다. ‘경직된 청렴 사회’, 곧 관료제 철창에 갇힐 날이 올 거다.

오페라·뮤지컬·연극 배우는 신기(神氣)에 산다. 흥행에 성공하면 생계가 약간 나아질 뿐인데 대기업 후원이 썰물처럼 빠졌다. 시민들이 표를 사야 객석이 찬다. ‘문화 융성’의 전사들이 김영란법의 직격탄을 맞았다. 언론·방송도 비상이다. 취재원과의 은밀한 거래가 사라진 것은 좋으나 번잡한 규제가 일선 기자의 취재력을 위협한다. 협찬이 줄어든 방송사도 서민이 즐길 드라마 제작에 애로가 쌓였다.

대학은 감옥이 됐다. 숙지할 법령해설집이 100쪽이다. 대중 강연·세미나·자문·대민 활동을 사전 보고하고 결재를 받는다. 서약서 쓰고 어기면 형사처벌, 북한 김일성대학도 이럴까. 강연·칼럼 등 모든 지식 활동의 상한 가격은 30만원 정(整), 각종 위원회 소속 사립대 교수도 적용 대상이다. 위원회 교수들과 정부 부처, 업체 간 비리 담합은 소멸될 것이다. 좋은 일인데, 권익위의 초정밀 규정이 지식의 사회적 공유회로를 망가뜨릴 위험은 예상하지 않았다. 한국을 IT 강국, 제조업 강국으로 만든 원천인 이공계의 산학 협동과 수시 자문은 고사할 판이다. 바이오 강국? 잊어야 한다. 일본·중국 산업계가 기뻐할 일이다. 곧 스타 교수들의 명강의는 소멸된다. 지식을 근(斤)으로 달아 팔라는 김영란법 규정 때문에 인문학의 대중화는 파산을 예고한다. 학생 면담·회식을 피하라는 대학에 인격·인성 교육을 기대하는 학부모들에게 송구스럽다.

3·5·10 원칙이나 더치페이는 가장 바람직한 기초 조항이다. 김영란 석좌교수가 인터뷰에서 상냥하게 말했다. “더치페이, 좋지 않아요?” 그런데 교육·언론·문화계를 촘촘한 형틀에 가둔 나라가 있는가? 지식·정보 생산과 공유에 족쇄를 채우고 자발적 선의(善意)와 공헌 활동을 불온시하는 숨 막히는 규제 공간, 이게 문화 융성과 창조경제에 목맨 정권의 작품이다. 정부는 향후 2년을 두고 보자 했다. 청렴 사회는 오겠으나, 2년은 창의적 행위가 고갈될 충분히 긴 시간이다. 신속한 재설계가 답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