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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훈육사회를 환영함

바람아님 2016. 10. 25. 15:57

(중앙일보 2016.10.17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김영란법이 낳은 혼란 양상은 ‘자각의 진화’를 원점으로 되돌려

권익위 훈육권력, 동양정신 버려

교육현장을 지식 매매시장 규정/ 말과 글에 재갈 물린 게 문제

지식 회로 파괴는 역사적 대역죄


1985년 미국 보스턴, 이상한 논쟁이 벌어졌다. 자동차 좌석벨트 착용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두고 

인권침해 반론이 비등했다. 생명은 나의 것, 벨트 착용 여부는 자신이 결정한다는 논지였다. 

결국 의무 착용으로 끝났는데 군부 통치에 길들여진 후진국 청년에게는 쓸모없는 낭비로 보였다. 

그게 자율사회의 저력임을 훗날에야 깨달았다. 요즘도 미국엔 블랙박스를 장착한 차량이 드물다. 

영국에는 위치 추적을 강제하는 앱은 불법이다. 

한국은 폐쇄회로TV(CCTV) 천국, 으슥한 골목은 괜찮지만 택시 내부에 설치된 것은 여간 

불쾌하지 않다. 실랑이해 봐야 소용없다. 기사 권한 밖의 일이므로.


프라이버시는 주체성의 다른 말이다. 상식과 양심의 내부 검열을 거친 판단은 인격이고 인권이다. 

갓 입대한 신병에게 들이댄 생활기록부가 인권침해라는 항의가 나올 정도는 됐다. 

정당한 사유 없이 누군가의 범법 기록, 병력 기록을 뒤지면 불법이다. 

그런데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법)이 낳은 혼란 양상은 소중한 ‘자각의 진화’를 원점으로 되돌린다. 

상식, 상규조차도 적법 여부를 국민권익위원회에 타진해야 하고, 일일이 행동 요령을 하달받는 초유의 사태가 그것이다.

 

 국가대표 기성용의 아내 한혜진에게 준 초대권은 불법인가? 조직 구성원 간 경조사비를 주고받을 수 있는가? 

동료 돌잔치 선물은 불법인가? 도대체 친구는 만날 수 있는가? 

워싱턴 국제회의에 참가한 부총리와 금융 관계자들이 더치 페이 하느라 긴 줄을 서자 호텔 직원이 짜증을 냈다. 

부정 비리 네트워크를 끊는다는 취지는 백번 옳으나 공사 네트워크를 구성한 수천 개 단위행위의 적법성을 캐물어야 한다면, 

우리는 애써 주체성을 반납하고 ‘훈육사회’를 불러들인 셈이다. 

‘생화는 불법’, 이 웃기는 훈령을 권익위는 “교육은 워낙 공공성이 강한 영역”이라는 단호한 명제로 정당화했다. 

문화 국가라면 학생권과 교육 ‘공공성’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을 거다.


공공성 개념은 적어도 10여 개에 이른다. 

이유 불문하고 ‘직무관련성’을 모든 행위에 들이대는 것은 형식적 공평성(impartiality)인데 이심전심과 공감에서 비롯되는 

공정성(fairness)을 훼손한다. 공평성은 훈육(訓育), 공정성은 양육(養育) 개념이다. 

권익위가 휘두른 훈육권력은 인예(仁禮)로 신의(信義)를 밝히는 동양정신을 버렸다. 

대한제국이 공포한 ‘교육입국조서’(1895)는 지덕체(智德體)를 양(養)해 사리 분별에 힘쓰라 일렀는데, 120년 후 

권익위는 뇌물 여부를 가리라고 훈시했다. 

누가 교육현장을 메마른 지식 매매시장으로 규정하라 했는가?


훈육사회가 명한 주체성 반납 사태는 대학과 지성계에 한파를 몰고 

왔다. 교수들이 외부 강연과 집필, 학회, 세미나 참석을 줄줄이 

취소했다. 집필과 강연에 상한가격이 매겨졌고, 신고서 제출이 

의무화됐다. 이참에 연구나 하라고? 돈이 문제가 아니다. 

말과 글에 재갈을 물린 게 문제다. 

모든 연구는 시대 고민과 접속한다. 

예나 지금이나 연구물은 사회적 공유 자산이고 교양강연, 학술·공익 

강연은 공론장을 풍요롭게 하는 공공 활동이다. 노엄 촘스키, 

폴 크루그먼 같은 공공 지식인(public intellectual)이 그렇다.


경제시민(기업인)이 상품을 생산하듯 교양시민(전문가)은 

논리와 윤리, 말과 글을 생산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한 ‘4차 혁명’의 수원지인 가상현실을 탐험하는 비행체가 상상력인데, 그것은 말(언어)과 글(기호)로 

구동한다. 상상력의 원천이자 지식국가의 기반이다. 지식 생산과 유통의 차단은 필경 역사에 상흔을 남기고야 만다. 

마치 18세기 말 문체반정과 19세기 전반 세도정치가 지식국가의 다양성을 틀어막았듯이 말이다. 

당대의 문사(文士) 박지원을 위시해 규장각 각신이 시도한 문체 실험은 19세기를 대비한 정신혁명이었는데, 성리학 수호라는 

도덕적 재무장 교시에 막혔다. 추사의 실증주의 학문도 세도정치의 강권에 좌절됐다. 경향 분리가 일어났고 학자들은 

지역적 분절 상태로 내몰렸다. 대가는 쓰라렸다. 19세기 ‘지식의 암흑시대’가 초래돼 결국 식민지로 이어졌다.


지식 회로를 망가뜨린 것은 역사적 대역죄다. 권익위는 무슨 권리로 대학과 지성계를 조련하는가? 

누가 일반 시민의 행위를 일일이 판결하라 일렀는가? 

시민 행동 매뉴얼에 가득 찬 그 한심하고 경직된 잣대를 동의한 바가 없다. 

70, 80년대 이념 통제에서 풀려난 시민들은 30년 후 생활세계를 재단하는 표준화권력에 직면했다. 

행동의 표준화는 정신의 획일화를 낳는다. 자율주체가 만드는 사회관계의 생동력은 권익위 훈령 속으로 증발됐다. 

정부도 문제를 인지했는지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해 더 명료한 매뉴얼을 만들겠다고 했다. 

더 명료한 ‘훈육 원리’를 뜻하는가? 

‘청렴사회’와 ‘훈육사회’의 맞교환, 그래도 해야 한다면 필자는 기꺼이 주체적으로 ‘주체성 반납’ 대열에 동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