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6.11.14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탄핵 카드는 합법성 가장한 선동/ 새누리당은 해체돼야 마땅해
박 대통령 결코 임기 채울 수 없어/ 국정 전반에서 즉시 물러나고
대선 준비 위한 퇴진 일정 밝혀야/ ‘질서 있는 퇴진’ 국정혼란 최소화
촛불의 물결은 장관이었다. 무너진 심정을 부여잡은 사람들이기에 더 감동적이었다.
생면부지 사람들 간에 잊었던 동지애가 흘렀다. 그 공감의 전파는 함성을 타고 전국으로 퍼졌다.
인파에 밀려 광장 중심부로 진입하지 못한 사람들은 골목길을 돌며 구호를 외쳤는데,
증발된 자존감이 다시 생성되는 듯 상기된 표정이었다. 청소년 악대가 지도교사의 북소리에 맞춰
‘임을 향한 행진곡’을 연주하는 광경은 노조나 농민연합의 기획집회보다 더 뭉클했다.
그 곡을 탄생시켰던 시대적 아픔이 청소년들에게 감염된 것인가.
촛불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비로소 시민이 되었다.
위급한 현실을 공감하고 해결을 위한 합주 행동에 나서는 것이 시민됨의 최소한의 요건이다.
외신들은 경외감을 실어 뉴스를 타전했다. 100만 인파가 한자리에 모이는 광경을 처음 접했을 것이다.
이웃 일본이나 중국, 심지어 미국조차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저 100만 시위대의 일사불란한 집회(集會)와 산회(散會)는
한국에서만 가능한 현상이다. 100만 인파가 발성한 하나의 목소리에서 한국인의 강한 민주적 심성을 발견했다.
공화국의 정체성을 뒤흔든 이 놀라운 사건의 중심이 대통령이라는 믿기 힘든 사실에 직면했을 때 시민들은
고통스런 결단을 내려야 했고, 그걸 확인하는 결제의례가 필요했던 거다.
각자 생업으로 복귀한 이 시간, 광화문은 평소의 모습을 회복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향후 행로 찾기는 ‘박근혜 대통령이 결코 임기를 채울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국가를 사당화했고 헌법정신을 위배했다. 12일의 광장은 ‘헌정 중단’의 시간을 끝내고 ‘헌정 회복’을 요청한 촛불이었다.
100만 시민이 외친 ‘하야!’는 그런 뜻이다. 하야하라고 즉시 내려오는 권력자는 드물다.
선거철에는 유권자 1명을 10명으로 셈하는 정치인들은 하야 국면에서는 100명을 1명으로 간주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어쨌든 빠져나갈 틈새를 찾을 텐데, 그러면 민란에 직면하고 불행하게 쫓겨날 각오를 해야 한다. 37년 전처럼 말이다.
그러면 탄핵? ‘민란과 탄핵’ 모두 고통스러운 시간과 엄청난 비용을 필요로 한다. 이래저래 딜레마다.
민란은 물론이고 탄핵을 피해야 할 이유는 여럿이다.
민란은 수많은 시민의 희생을 초래하고 뜻밖의 무력충돌을
불러올 위험이 있다. 극도의 혼란을 감내해야 한다.
민란이 성공해도 대통령 궐위에 따라 ‘60일 이내’ 대선을 치러야 한다.
이건 가능한 대안이 아니다.
탄핵 역시 산 넘어 산이다.
국회의원 200명을 요하는 탄핵결의도 문제려니와, 탄핵소추의
법적 근거를 확증하려면 이미 ‘잠재적 피의자’가 된 대통령을
검찰 포토라인에 세워야 한다.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내치는 물론 외치도 올스톱이다.
공론장이 들끓고 거리에 각종 시위대가 진을 칠 것이다.
헌법재판소 판정은 최장 6개월이 걸리는데 그때 합헌판정이
내려지면 다시 ‘60일 내 대선’이 기다린다. 지루한 싸움과 혼란 끝에 치러질 대선은 자칫 더 큰 화를 불러올 가능성이 많다.
그러니 대통령과 친박 무리가 탄핵하라고 버티면 나라는 미증유의 혼란으로 빠져든다.
대통령의 범법이 분명해진 현실을 감안하면 꼭 탄핵을 택할 필요는 없다.
‘헌법과 절차’를 강조하는 주장은 일견 그럴듯해 보이나 기실은 합법성을 가장한 선동에 불과하다.
탄핵 카드를 조심스레 거론하는 새누리당은 그런 점에서 해체돼야 한다.
‘질서 있는 퇴진’. 촌철살인 논평으로 주가를 올리는 국민의당 박지원 대표가 내놓은 대안이 돋보이는 이유다.
의뭉스레 사태의 향배를 저울질하는 박근혜 대통령이 택할 가장 바람직한 퇴로가 ‘일정을 밝힌 단계적 퇴진’이다.
민란과 탄핵이 불러올 국정혼란을 최소화하고, 시민 생업의 정상화와 심리적 안정을 꾀하고, 정당에 대선 준비를 위한
시간적 여유를 갖게 하려면 퇴진 의사와 함께 퇴진 일정을 분명히 밝혀주는 것이 최선이다.
평소 입이 닳도록 강조한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라도 박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최후의 유일한 역사적 공적이 될 거다.
국가를 난장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아집만은 제발 피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야 거국중립내각이라는 한국정치 최초의 실험도 순풍을 탈 수 있다.
2017년 4월 25일을 대통령 퇴진일로 제안한다.
그리고 6월 24일 대선을 치른다면 각 정당은 지금부터 7개월 정도의 준비 기간을 확보할 수 있다.
물론 대통령이 국정 전반에서 즉시 물러앉는다는 대국민 약속을 전제로 말이다.
외치와 군 통수권 문제로 난색을 표명하는 사람들은 ‘부드러운 이행’을 방해하고 정권연장 음모를 감추고 있다고 봐야 한다.
선례가 없는 국가 위기를 수습하는 데에는 헌법조항을 조금은 융통성 있게 해석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행 과정의 적법성을 가름해줄 가칭 ‘국가헌법자문위원회’를 신설해 운영해봄 직하다.
모든 것은 대통령의 대국적 결단에 달렸다.
그런데 추미애 대표의 돌발 행동은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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