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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환국열차', 출발하다

바람아님 2016. 12. 20. 08:57

(중앙일보 2016.12.12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탄핵은 환국의 신호다
광장에서 권리 되찾았다면 이제 의무를 수행할 차례다
차기 정권은 성장위기, 금융위기 혁신위기의 삼각파도 견뎌내야
‘양보와 자제’가 시민자치의 덕목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문법에 무지했던 대통령의 ‘군주의 시간’을 중단시켰다. 
청와대, 그 적막한 관저에 대통령을 위리안치했다.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직업과 계층이 다른 이질적 시민이 한 몸이 됐던 것은 정치의 최상위 명제인 도덕정치와 신뢰를 목말라한 때문이었다. 
대통령의 인식공간에는 덕치(德治) 개념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시민들은 마지막 수단인 법치를 발동했다. 
궁정 내부에서 맴돌다 손상된 국민주권을 간신히 건져 냈다. 
매 주말 개최된 만인소(萬人疏) 횃불에 놀란 국회의원 234명이 도장을 꾹 눌렀다. 
‘국가의 시대’가 마감되고 ‘시민의 시대’가 열렸다.

 장쾌하고 비장했던 광장의 촛불은 내친김에 퇴진운동으로 질주한다. 손팻말이 바뀌었다. 
남쪽 바다 거문도 어민들이 항해시위를 했다. 뭍에도, 섬에도 상처가 그리 깊었다. 
전국 100만 시민집회에 ‘조기 퇴진’과 ‘구속 수사’라는 구호가 출현했다. 
집권 1380일, 공무시간에도 대통령은 주로 집(관저)에 머물렀으니 그럴 만하다. 목말을 탄 꼬마의 손에도 팻말이 들렸다. 
위리안치만으론 미완(未完)이라는 뜻이다. 
광화문에 촛불 모형이 세워졌고, 세월호 영혼은 푸른 돌고래가 되어 둥둥 떠다녔다. 
만인소 행렬이 다시 청와대를 에워쌌다.

정녕 아직은 미완이지만, 이 시점에서 조금 냉정해질 필요는 있다. 
헌재 심의 중에 자진퇴진이 가능한지는 전문가 의견이 엇갈리고, 
두어 달 앞당긴 조기 퇴진이 중장기적 국정안정화에 도움이 
될지를 따져봐야 한다. 
탄핵열차가 종착역에 들어오자 대선열차가 출발했다. 
탄핵은 환국(換局)의 신호다. 
탄핵열차의 승객은 일심동체, 이구동성의 촛불공중(candle public)
이었다면 환국열차의 승객은 쉽게 분절하는 이슈공중들
(issue publics)이다.
 환국열차는 개헌, 새누리당 심판, 국가개혁, 경제위기 역(驛)에 
정차할 것이고, 사이버공간에 떠도는 ‘박근혜 정권 부역자 색출운동’이
뒤섞이면 광장의 도덕적 취회(聚會)는 수갈래 이념군중으로 갈라선다.
정당과 대선주자들이 판단할 사안이 이것이다. 
‘구속 수사’ 물결에 편승할까, 아니면 국가개혁 과제를 지목하고 차분한 대응을 요청할까.

 광장을 통해 시민권의 힘을 체득한 시민사회도 숙고할 사안이 있다. 
노동자와 농민, 각종 협회와 연맹이 익명의 시민들과 이렇게 단호한 공감을 가져본 적은 없다. 
트랙터와 버스, 택시와 자가용이 한시에 경적을 울리고 달동네와 고급아파트 단지가 일시에 소등한 적이 있는가. 
산출 없는 ‘무정란정치’가 불러온 의외의 소득이었다. 
그런데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 박근혜 정권에서 감내한 손실리스트를 꺼내 보면 통치력이 증발된 무주공산 광장으로 
다시 나오고 싶다. 농민의 ‘쌀값 보장’은 임금생활자의 ‘밥값 인상’이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이익충돌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각종 파업명분을 일반 시민이 양해할지 의문이다. 
조선업과 해운업 불황, 경기침체, 여기에 재벌탄핵 깃발이 펄럭이면 경비병에 불과한 과도내각은 휘청거릴 거다. 
고질적 정경유착을 폐하고, 통치기구의 투명성 확증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 
거버넌스가 위태롭지 않은 범위 내에서 말이다.

 돌아갈까, 남을까. 떠나온 섬으로 돌아가는 조각배들이 광화문광장에 정박해 있다. 
승선 거부를 외치는 사람들이 넘치지만 국가개혁과 단기적 정치일정에 대비하는 일은 물론 그간 이념 투쟁을 촉발해온 
내 마음속 거대한 암석 뿌리를 성찰하는 일도 광장 집회만큼 중요하다. 
청와대를 축소하고 열어젖히는 것과 통치기구 개혁에는 보수, 진보 구분이 없다.

 그러면 장기 과제는? ‘시민의 시대’에 전개될 시민민주주의의 혈액이 문제다. 
‘양보와 자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배려, 시민민주주의는 그런 ‘마음의 습관’으로 작동한다. 
우리는 12월 9일 ‘구체제 청산’을 선언했는데, 핵심은 국가의존적 관습과 결별하는 거다
몇 달의 통치력 부재 공간을 시민 자치로 건너야 하고, 곧 닥칠 삼각파도를 그것으로 견뎌야 한다. 
지난 6일 서울대가 개최한 국가정책포럼에서 신정부가 겪을 ‘삼각파도’ 경고가 나왔다. 
김세직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각 정권마다 1%씩 하락했다고 지적했다. 
‘1% 하락의 법칙’이 유효하다면 신정부는 경제성장률 0%, 과잉투자와 결합한 금융위기에 직면한다. 
이정동 공대 교수는 혁신역량의 위기를 무겁게 꺼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군에서 지적소유권 교역 적자폭이 가장 큰 나라가 한국이다. 
뭔가를 해낸 듯한 ‘착각의 시간’이 지나면 급격한 ‘추락의 시간’이 온다. 
차기 정권은 성장위기, 금융위기, 혁신위기라는 삼각파도를 견뎌내야 한다. 
광장에서 권리를 되찾아 왔다면, 이제 의무를 수행할 차례다. 
탄핵 성취 대가로 얻은 시민 자치의 필수 덕목은 ‘손실의 내면화’일 텐데, 우리의 시민성 창고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광장에서, 혹은 귀로에서 자문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