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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노년의 양식

바람아님 2017. 1. 10. 23:56
[중앙일보] 입력 2017.01.09 21:19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따뜻한 겨울은 좀 낯설다. 얼음이 꽝꽝 얼고 북서풍이 매섭게 몰아쳐야 겨울 맛이 난다. 두툼한 외투 속에 언 마음을 녹이고 싶다. 보온하고 싶은 상처가 어디 하나둘인가. 새해 벽두, 덕담 속에 온기를 느끼고 싶었으나 대통령이 뜬금없는 변명을 쏟아내는 바람에 시름이 더 깊어졌다. 안 그래도 마음 상처가 욱신거리는데, 대통령이 고른 율사들은 왜 하나같이 그 모양인가. 전국 변호사 2만 명 중 ‘비정상회담’ 대표 논객인지, 아니면 우주의 기운을 받아 헌법을 사뿐히 밟고 공중 부양하는 고수인지는 모를 일이다. 대통령의 법리 다툼도 그리 좋은 모양새는 아닌데, 대학 교양강의에서도 서로 자제할 극단적 발언을 마다 않는 대통령 측 변호인을 보면 말년(末年)의 기품이 뭘까 의구심이 든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나이듦에 대해 성찰한 바가 있다. ‘노년이란 존재 자체로서 빛나는 연령’이다. 생애에서 쌓은 경험과 경륜으로 미지의 지평을 열 수 있는 지혜가 있다. 욕망을 버리는 나이, 인생 관조, 외골수를 자제하는 균형감각이 노년의 양식이다. 다산 정약용은 61세를 맞아 ‘자찬묘비명’을 썼다. “나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안다고 했으나 그 행한 것을 생각해 보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백성의 편안한 삶을 두루 다 살피지 못했다는 뜻이다. 평생 500여 책을 남겼으니 다산 선생도 고수인 것은 분명한데, 중용과 균형과 조망에 탁월했다. 우리 같은 범부의 양식은 특별한 게 없다. 그저 후세대를 이해하면 족하다. 40·50대 생활전선을 뚫는 중·장년과 입신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20·30대의 심정을 헤아려주면 된다. 그리하여 스스로 빛나는 나이, 은령(銀齡)이다.

 은령 세대는 밥벌이가 얼마나 고역인지 충분히 알지 않는가? ‘나 홀로 정치’와 국정 농단 사태가 몰고 온 경제 한파를 서민들이 고스란히 떠안았다. 말도 못하고 끙끙 앓을 뿐이다. ‘외환위기 이후 최대 불황’이라는 한탄이 터져나온다. 한국은행은 최근 통계에서 치킨점 절반이 3년 내에 폐업했고, 외식업체 80%가 매출 급감을 겪는 중이라고 밝혔다. 자영업자의 가계부채 비율은 소득 대비 345%로, 비(非)자영업자 190%의 1.8배에 달한다. 밥벌이를 해야 밥을 먹는데, “술이 덜 깬 아침 속이 쓰려 넘길 수가 없는데, 이것을 넘겨야 이것을 버는데” 몸을 이리 부려도 대책이 없다면(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밥벌이 선배로서 따뜻한 위로 한마디가 더 어울리지 않겠는가?


  대통령 변호인단 서석구 변호사, 금년 73세 은령에 접어든 대구·경북(TK) 수재 율사가 지난 6일 헌재를 나서다 울분을 쏟아냈다. CBS 김현정 앵커와의 인터뷰에서다. ‘촛불은 대한민국에 대한 선전포고’ ‘조사도 안 하고 대통령을 단두대로 보내는 정치검찰’ ‘이석기 석방을 외치는 이적집회’라고 언성을 높였다. 시민들이 혹여 그리 변질될까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알기는 하나? 이적단체도 한몫 끼고 싶었을 거다. 그럼에도 거대한 촛불 물결 속 티끌 하나로 봐야 ‘노년의 양식’일 터, 이적단체가 조종하는 시민집회라 했다. 밥벌이 접고 나온 사람들은 정말 밥이 안 넘어갈 거다. 혹시 경북대 강연회에서 이런 논조로 풀었다면 어땠을까? 영락없이 경북대 ‘멍에 회원’ 1호다.

 기왕 궤변(詭辯)에 단련된 몸이니 여기까지는 봐주자. “불온한 총궐기에 국가 운명을 맡기는 것은 예수님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필자는 개인 종교관을 존중하는 사람이다. 한국이 ‘성스러운 유교국가’에서 ‘세속적 근대국가’로 이행한 것은 정확히 120년 전이다. 국가종교는 폐기됐고, 종교는 개인 소관으로 이전됐다. 1897년 경북 대구에서 향민(鄕民)들이 천주교 신도들을 폭행한 사건이 발발하자 외부대신 유기환은 ‘교민범법단속조례’라는 법치로 해결했다. 정교(政敎) 분리였다. 그런데 120년 후, 대구 출신 율사가 촛불집회는 예수님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누구 맘대로, 법리투쟁의 최상 심급에 예수, 석가모니, 마호메트를 상정하라 했는가? 필자는 대한민국이 단일종교 국가였다면 분열 없이 더 행복했을 거라 믿는 사람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성경, 불경, 춘추(春秋)와 예기(禮記) 중 하나에 손을 얹고 종교윤리를 지켰을 거다.

 그저 바라보고 관조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노년의 양식’이다. 필자를 포함해 박근혜와 그 세대가 할 일은 미래세대를 세습사회로 몰아넣은 치명적 실수에 용서를 비는 마음가짐이다. ‘조금은 미안한 웃음으로, 조금은 걱정된 눈빛으로’ 독점한 자산을 베풀고 멍석을 깔아주는 아량이다. 태극기 휘날리며 당신의 자녀들을, 시민들을 이적단체로 몰아세울 일이 아니다. 태극기는 탄핵 규탄의 상징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의 공유자산이다. 태극기로 촛불을 끄는 순간, 당신의 자녀가 묻힌다. 신년 벽두가 왜 이리 심란한가?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