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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조공의 재구성

바람아님 2017. 1. 24. 23:50
[중앙일보] 입력 2017.01.24 01:05

삼성 스캔들은 ‘정경유착’보다는 정권이 공물 강제한 ‘조공관계’대가라면 해코지 피하려는 것
강압적 공출부터 중단시켜야지 조공사절단이 백성에게 돌 맞고 의금부에 투옥되는 꼴이라니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서울대 교수


화이(華夷)질서의 핵심은 조공이었다. 가장 열성적 조공국은 오키나와(琉球)였고, 조선이 다음이었다. 조공에 소홀하면 괘씸죄를 징벌하러 군대가 온다. 정조 연간의 괴짜 박지원이 8촌 종형에게 빌붙어 말꼬리를 잡고 압록강을 건넜다. 건륭제 칠순 잔치를 축하하는 긴 행렬이었다. 1년에 30여 회를 갔으니 나라 곳간이 축났다. 그래도 병자호란 직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정권이 바뀐 것을 외면한 조선을 징벌하러 청(淸)의 용골대가 군사를 끌고 왔다. 개성유수가 군사 출현을 보고했으나 몽골 기병은 무악재를 넘어 서소문에 도착한 후였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겨울을 났다. 용골대는 홍이포를 검단산에 거치하고 가끔 대포를 날렸다. 늦은 겨울, 식량이 바닥난 인조가 삼전도로 나아가 삼배구두로 용서를 빌었다. 괘씸죄로 공물이 폭증했다. 세자·대군·빈을 인질로 잡고 궁녀 수백 명, 군마, 곡식, 방물을 싣고 돌아갔다.

이게 꼭 ‘정경유착’이라는 악습의 현대판이다. 박근혜가 취임 직후 대포를 날린 표적은 잠실벌에 있는 롯데였다. 박근혜 경선 탈락의 계략이 MB캠프가 입주했던 롯데호텔에서 나왔다. 롯데는 그 은공으로 잠실벌에 남한산성 높이만 한 100층 빌딩을 올렸다. 박근혜는 홍이포보다 더 무서운 국세청과 검찰을 동원했다. 다행히 신동빈 회장은 목숨은 건사했으나 친인척이 줄줄이 탈세·횡령 혐의로 구속됐다. 재벌 총수들 군기잡기로 더할 나위 없는 건수였다.

박근혜가 ‘창조경제!’를 제창하자 17개 대기업이 전주(錢主)를 자임해 앞다퉈 공물을 바쳤다. 삼성은 대구·경북 기지에 1900억원을 댔다. 창조경제 후 다시 ‘문화융성!을 외쳤다. 삼성은 K스포츠·미르재단에 204억원을 바쳤다. 여타 재벌은 눈치작전으로 공물액을 조정했다. 밉보이면 군대(국세청·검찰)가 오고 총수가 삼배구두에 투옥될 위험이 있다. 그러니 버틸 재간이 있는가. 노무현만 빼고, 모든 정권이 공물을 요구했다. 노태우는 2000억 착복, YS는 그 보다 더한 경제파탄, DJ는 평양 송금, MB는 미소금융이었는데, 그게 다 재벌 공물로 충당됐다.


더러는 대가를 바랐을 거다. 롯데의 100층 빌딩은 보훈 성격이 짙으나 돈이 오간 흔적을 찾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대통령과 직거래는 어렵다. 정권사업을 요청하는 대통령에게 민원을 들이댈 간 큰 총수가 있을까. 권력자에게 증공(贈貢)은 일종의 보험이지 민원청구가 아니다. 수공(受貢)자가 어여삐 여겨 은사를 베풀 수는 있는데 그러면 즉각 뇌물죄가 구성된다. 연행사절은 북경 천안문 앞에 달포쯤 대기했다가 황제를 배알하고 60여 일 걸리는 귀국길에 오른다. 민원? 그런 걸 들이댔다간 불경죄다. 문화융성·승마협회·동계스포츠 합쳐 430억원을 바친 삼성에 박근혜는 무엇을 하사했는가? 그걸 색출해야 특검의 영(令)이 선다.

특검은 삼성물산, 제일모직 합병과 경영권 승계를 하사품으로 지목했다가 낭패를 봤다. 탐문과 보도를 종합해보면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독대해 정유라를 왜 지원하지 않냐고 질책한 건 합병이 완료된 일주일 후였다. 최순실이 독대 며칠 전에 대통령 옆구리를 찔렀다. 삼성이 혼비백산해 넉넉하게 줬을 가능성이 있다. 이게 뇌물인가, 조공인가? 아리송하다. 뇌물이라면 합병기간에 대통령의 특별 언질이 있어야 한다. 문형표 전 장관이 메신저 아닐까? 글쎄다. 세월호가 침몰되는 순간에도 넋 놓은 대통령, 창조경제·문화융성에 혼이 나간 대통령이 주식시장 동향에 관심이나 가졌을까? 그렇게 세심했다면 민생이 이리 파탄 나지도 않았을 거다. 문 전 장관은 관심을 가졌을 거다. 악명 높은 투기자본 엘리엇의 공세를 막아내야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매각했다가 매국노로 찍힌 변양호 꼴을 면한다. 소액투자자도 엘리엇 공격을 애국심으로 막았던 게 합병 당시의 분위기였다. 매각은 삭탈관직, 막는다고 거들면 감옥행이다.

합병으로 국민연금은 3000억원 손실을 입었는데, 삼성전자 주식으로 그 사이 7조원 수익을 올렸다. 국민연금 투자액의 26%가 삼성 계열사 주식이다. ‘경제보다 정의를 중시했다’고 특검은 당당하게 말했다. 그건 독재시대 ‘정경유착’의 문제지 이 시대 ‘조공관계’에는 적실성이 약하다. 조공관계에서 공물은 강제된 악습이다. 대가라면 오직 과다 할당액과 해코지를 피하고 싶은 것. 이 경우, 정의란 무엇인가? 수공자의 강압적 공출을 우선 중단시키는 일이다. 삼성은 평창 올림픽 1000억원을 포함해 무려 3000억원을 공물로 바쳤고 다른 재벌 역시 뜯기긴 마찬가지다. 그리고 정의의 칼날을 받았다. 비유한다면 조공사절단이 백성에게 돌 맞고 의금부에 투옥되는 것과 같다. 재벌도 정신을 차려 기업시민으로 거듭나야 하지만 특검의 과녁은 국정문란에 맞춰져야 한다. 뇌물죄 구성에 진력해 ‘정의롭고 정상적인 국가’라는 절박한 목표를 미완 과제로 넘기면 직무유기다.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