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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무서운 아이들

바람아님 2017. 2. 22. 00:15
[중앙일보] 입력 2017.02.21 00:51

대통령을 ‘걔’라 부르는‘존경의 철회’가 팽배
지도층 비열한 풍경이 부른 기성세대의 업보
무능한 통치 계속되면 더 무서운 아이들 양산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1990년대 말, 대학원 수업에서의 일이다. 독일의 사상가 니체(Nietzsche)의 인간학적 관심이 주제였다. 지금은 사십대 초반쯤 됐을 학생이 현학적으로 말했다. “걔는 계몽 속에 내재한 모순을 파고들었는데….” 그 다음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걔는 누구인가?” 당황한 표정으로 교수가 물었다. “니체죠.” 당당한 답변이었다. 교수는 이때를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참지 못했다. “자네는 자네 할아버지도 걔라고 하나?”

‘존경의 철회’가 일어났던 거다. 권위주의가 무너지고, 소련과 동유럽권이 붕괴된 이후 90년대 세대는 광장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돌아간 곳은 개인주의의 밀실. 그곳에 샤갈의 환상적 그림이나 로트레크의 퇴폐적 그림을 걸었다. 밀실을 문화적 취향으로 채색해 무너진 광장의 허무를 달랬다. 광장에 걸었던 우상은 철거됐다. 사상가, 종교지도자는 물론 사회명사와 엘리트집단에 대한 존경의 철회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아마 교수도 술자리에서 ‘걔’였을 거다. 존경의 대상을 집단 참수한 공동묘지에서 새로운 권위를 세워보려는 젊은 세대의 사투는 이후 저성장의 늪에 막혔다.

그렇다고 좌절한 것은 아니다. 냉소할 뿐이다. 사회 지도층의 비열한 풍경이 시도 때도 없이 연출되기에 그렇다. 지난해 12월 국회 청문회는 철회될 존경의 마지막 무대였다. 총장과 학장이 결백을 호소하며 흘린 눈물은 대학의 권위를 익사시킨 폭우였다. 법망에 절대 걸리지 않게 미끄러운 어법을 구사한 법조인들의 전문지식은 간계였다. 자신의 업무영역에서 발생한 일을 ‘모른다’로 일관한 장관과 수석들은 돌쇠였다. ‘안다’고 털어놓은 사람은 흙수저, 혹은 힘센 자에 의해 고용된 하수인들뿐이었다. ‘적어도 인간’이 되고 싶은 하수인들이 그걸 저버린 상관을 ‘걔’라 불러도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수인이 걸려들었다. 2300개 녹음파일이 탄핵정국 막바지에 터진 것이다. 유상영 ‘더 블루 K’ 부장과 김수현 고은기획 대표 간 사적 담화에 ‘걔’는 놀랍게도 대통령이었다. ‘그거’도 대통령이었는데, ‘그거를 죽이고’에 이르러서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걔한테 나올 게 없으니 죽이고…’라는 국가반란적 언술에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주필은 기가 찼다. 너무 기가 찬 나머지 탄핵의 본질을 ‘고영태 일당의 재단 탈취 실패 사건’으로 규정했다. ‘대통령은 몰랐고 결백’한데 이게 어찌 탄핵거리냐고 했다.


과연 그럴까? 대통령을 ‘걔’로 부르는 무서운 아이들의 ‘반역질’에 정치권 전체가 딸려갔고, 언론은 이들의 확성기이고 로봇이었을까? 일단 최고의 권위인 대통령을 ‘걔’로 부르는 극단적 화법을 반역질과 분리하자. 이게 섞이면 정규재 주필이나 필자가 속한 베이비 부머들은 이성을 잃는다. 존경을 회복할 수 없도록 만든 기성세대의 업보다. 문제는 이 하수인들이 K스포츠와 미르재단 설립 초기부터 그런 반역을 모의했는가 여부다. 최순실을 앞세워 엄청난 기금을 모은 뒤 탈취하려 했는가? 그렇다면 대통령을 노린 ‘희대의 사기극’이다. 기네스북 감이다.


이걸 입증하려면 재단 설립 이전부터 그런 정황이 발견돼야 한다. 영화 스팅처럼 말이다. 정규재 주필이 폭로한 녹음파일은 2016년 7월 4일자, 두 재단이 정치쟁점으로 떠오른 후였다. 하수인들은 재단문제가 불거지자 살 구멍을 찾아 음모했다. 친박과 연루시켜 터뜨리면 대통령을 죽이고 자신들은 살 수 있는 틈이 보였다. 무서운 아이들이다. 혹 나머지 파일을 꼼꼼히 점검하면 생존기획이 아니라 탈취의 정황이 발견될지 모른다. 발견되더라도 사건의 본질, ‘권력의 사유화’라는 헌법질서의 훼손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은 그렇게 사유화됐고, 비선 실세에 의해 국정 농단이 이미 일어났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사기당했다 해도 결국 국민이 사기당한 죄가 덮이지 않는다.

태극기 행렬이 홍수처럼 불어 나라가 반쪽으로 갈라졌다. 박정희의 성장신화와 반공이념이 삶 속에 박혀 생체의 일부가 된 사람이 이리 많다. 우리의 역사 현실이다. 1850년대 프랑스, 나폴레옹의 휘광을 걸치고 등장한 그의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는 무능한 독재자였다. 나폴레옹의 화려한 기억에 현혹된 무능한 의회와 무능한 자본가가 동조했고, 시민계층과 노동자, 농민은 우왕좌왕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월(霧月)이 시작됐다. 이 틈을 타 보나파르트는 공화정을 뒤엎고 쿠데타에 성공했는데, 결국 프랑스 시민들은 독일과의 일대 전쟁에 내몰려 가족과 재산을 잃어야 했다.

‘양극화 성장’과 ‘무장된 반공’이 나라를 살리는 시대는 지났다. 박근혜가 살아 돌아와도 과거의 영화를 결코 살려내지 못한다. 시대 문법이 변한 지 오래, 아버지 망토를 걸친 무능한 통치로는 나라가 과거와 미래로 갈리고, 권력에 편승해 한탕을 도모할 더 무서운 아이들을 만들어낼 뿐이다.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