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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곡성<哭聲>

바람아님 2016. 11. 1. 23:37
[중앙일보] 입력 2016.10.31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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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서울대 교수 · 사회학


멍한 시간이 속절없이 지나갔다. 정신을 수습하려 애써봤지만 헛된 일이었다. 생기가 빨린 육신은 궤도를 이탈했다. 일상 업무에 집중할 수 없었다. 동료들도 그랬다. 마음의 중추신경이 훼손되면 일어나지 못한다. 지난주, 전 국민이 그런 상태였다. 주술에 걸린 가(假)수면 상태. 박근혜 대통령은 스스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를 터이다. 민주화 30년 동안 온 국민이 정화수를 떠놓고 짜낸 민주주의의 피륙을 칼로 끊었다.

37년 전 10월 26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유고방송의 슬픈 목소리는 청명한 가을 아침과 어울려 추상화처럼 번졌다. 멍한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우상화된 이념에서 풀려난 낯선 시간이었다. 이성은 곧 현기증을 물리쳤다. 멀게만 보였던 민주주의의 깃발이 눈앞에서 펄럭였으므로 극심한 혼란도, 쿠데타 소문도 일종의 축제 북소리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버지의 10·26과는 달리 딸의 10·26은 느닷없는 비기(秘記)의 습격이다. 멀쩡한 논리로는 결코 이해 불가한 심령의 세계, 계룡산 두마천 상류 무속촌에 가야 설명 가능한 드라마, 아니면 영화 ‘곡성’의 음침한 세계? 아버지의 10·26은 ‘우상과 이성’의 접전이었다면 딸의 10·26은 오랜 비설(秘說)과 접신한 듯한 민주주의의 오염이다.

 정녕 아니길 바라지만, 가수면 상태의 상상력이 자꾸 그 세계로 끌고 간다. 거길 가면 박자가 잘 맞는다. 아리송했던 퍼즐이 척척 들어맞는다. 그토록 고집한 ‘올림머리’는 어머니의 육화, 깃 올린 슈트형 재킷은 아버지 분장이었을까. 대선 당시 문재인 캠프가 ‘3년간 133종 옷’을 입었다고 공격했는데, 필자는 칼럼에서 3종 패션이라고 옹호한 바 있다. 그런데 모두 군복의 변형인 슈트형 재킷이고, ‘빨주노초파남보’와 흰색 일색이라면 바이칼호에서 연원돼 한반도로 내려오는 샤먼의 형상이 국가 지도자에게 옮겨붙었을까? 부질없는 상상이 꼬리를 문다. 모신(母神)을 얹힌 부친의 유업을 국정과제로 잇는 본부가 청와대, 지부가 문체부였나? K한류, K한식, K스포츠 등 K자는 ‘민족 중흥’ ‘한국적 민주주의’를 열망한 부친의 혼(魂)을 모시는 신위(神位)였을지 모른다. 적어도 무의식의 공간에서는 말이다. ‘늘품체조’가 나오고, 동상과 기념공원이 다시 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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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저녁은 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적적한 관저 깊숙한 칩거, 대통령의 깊은 밤은 한 번도 알려진 바가 없다. 언론은 홀로 보고서를 읽는다고 했다. 일가친척을 물리친 홀홀 고독이 동정심을 사기도 했다. 무엇을 했을까? 부모 영정에 유업 진척 상황을 들고 배알한 걸까? 매일 밤 수심정기하고 문화융성과 창조경제 독려차 국무위원과 수석비서관에게 사업 취지를 하달했다. 그 통치 문서는 영세교 교주 딸 최순실에게 전달됐고, 즉시 사업실행서로 둔갑해 청와대로 돌아갔다.

대통령의 치장은 최순실의 최면 행위였을까. 취임식 저녁 광화문 세종대왕 앞 오방낭 행사에서 입힌 빨간색 금박 한복 두루마기를 그런 배경으로 떠올리면 소름이 돋는다. 반듯한 유교 국가를 건사하려고 무격과 무속 신앙을 내쫓았던 군주가 세종이었다. 신역사를 써달라는 국민의 이성적 소망이 사교적 최면에 포박될 줄은 현군 세종도 몰랐을 터다. 우연히 2012년 2월 25일 취임식 아침에 썼던 필자의 칼럼이 떠올랐다.

“33년 만에 청와대로 돌아가는 귀환길에서 흉탄에 스러진 어머니, 격류의 탄환에 소멸된 아버지의 영정을 가슴에 품었을 것이다…. 그 청와대, 그러나 딱히 터놓고 심정을 나눌 지인들이 없는 여성 대통령에겐 홀로 감당하기 벅찬 그곳에 국민들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이젠 깨닫고 있을 거다.” 희망사고였지만 사실이기를 종용한 표현이었다. 그곳에 국민은 없었고, 홀로 제배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최순실은 그 제례의 집사이거나 교주의 메신저? 청와대는 제실(祭室)이었을까, 죽은 옛 교주의 축원을 내림받는 성소였을까.

절대로, 절대로 아니길 바란다. 4년 전 취임식 아침에 썼던 그 글이 틀렸듯이, 이 불경스러운 추리도 제발 3류 소설이길 바란다. 그런데 방방곡곡에서 터지는 곡성(哭聲)을 어쩔 수 없다. 21세기 백주대낮에 비설과 민주주의가 접선할 수 있는가? 왕조시대를 제외하곤 어떤 민주주의에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단코 그렇지 않을 것이지만 대통령은 이 곡성의 원인을 잘 헤아려야 한다. 왜 이 해괴한 괴담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무성한지, 탄식과 비애가 도처에 터져 나오는지를 말이다. 우선 우리 민주주의에서 심령적 재화(災禍)를 걷어낼 일이다. 햇빛 광장(廣場)은 그 출발일지 모르나 국민이 선출한 또 하나의 정통성인 정당이 존재한다. 이들 3당 협의체제에 향후 수습 방안을 맡기는 것이 더 현명하다. ‘통치력의 IMF’, 저간의 보도가 사실이라면 이미 조각 권력도 상실했다. 민란(民亂)을 피해야 한다. 다행히 민주주의는 복원력이 강한 정치체제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