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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아버지의 아이스크림

바람아님 2016. 8. 5. 08:26

(출처-조선일보 2016.08.05  이한빈 시나리오 작가)


이한빈 시나리오 작가내가 어렸을 때 무뚝뚝한 우리 아버지는 약주를 드시면 종종 
"한빈아, 아이스크림 먹고 싶니?"라며 집으로 전화를 거셨다. 
아이스크림 다섯 글자만큼 아이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게 또 있을까. 
삼남매 중 막내였던 나는 설레는 마음에 잠도 잊고 그의 귀가를 기다리곤 했는데, 초인종이 울리자마자 
현관으로 뛰어가 강아지 마냥 "아빠! 아빠! 아이스크림!"을 외치곤 했다. 
그럼 술 냄새를 풀풀 풍기던 아버지께선 활짝 웃으며 아이스크림이 담긴 봉투를 건네주셨다.

그런데 내가 조금씩 나이라는 걸 먹으면서 더 이상 아버지의 아이스크림 전화에 크게 기뻐하지도, 
설레지도 않게 되었다. 어느새 나를 비롯한 삼남매는 각자 일을 구해 돈을 벌기 시작하였고, 
몇 천원짜리 아이스크림 정도야 스스로 사먹을 수 있는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인가. 오랜만에 아버지께서 아이스크림을 사가겠노라 전화를 하신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일에 피곤했던 나는 "네, 그러세요"라고 담담히 대답을 하고선 먼저 잠에 들어버렸다. 
이후에도 그런 비슷한 상황들은 몇 번 반복되었고, 결국 아버지의 아이스크림 전화는 끊어지게 되었다. 

퇴근길엔 본인이 드실 막걸리나 한두 병 사오시곤 했던 거다.

[일사일언] 아버지의 아이스크림
그 이후에 나는 부모로부터 독립을 하였고 지금은 혼자서 살고 있다. 
즉, 더 이상 아버지의 아이스크림 전화를 받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정신없이 일과 사람에 치이는 일상을 반복하다 보면, 가끔씩 귀갓길에 아버지의 아이스크림 전화가 떠오르곤 한다. 
분명히 그때의 아버지도 지친 하루를 보내셨을 거라는 걸, 이제야 조금씩 짐작하며 깨닫게 되는 거다. 
무더운 날이 이어지는 요즘이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왠지 아버지가 사다주신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진다. 
힘든 하루를 보낸 아버지가 자식들을 위해 잊지 않고 사 오신 그 아이스크림을 말이다. 
아마 아버지 본인도 자신의 작은 선물에 깡충깡충 뛰며 즐거워하던 자식들의 웃음을 보며 지친 마음을 위로받지 않으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