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6.08.31 길해연·배우)
고마우신 분께서 전시회 티켓을 보내주셨다.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또 추천해 드리고 싶다는 짧은 편지와 함께. 이중섭 전시회 티켓이었다.
야호! 신나라. 봉투를 열고 티켓을 꺼내 들 때는 환호성을 질렀는데, 사진으로만 보던 이중섭 그림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바람은 매일매일 늘어나는 핑계에 밀리고 밀리더니 급기야
'그걸 꼭 거기까지 가서 봐야 돼?'라는 물음에 깨갱 꼬랑지를 감추고 숨어 버렸다.
바쁘고 피곤하고 시간이 애매하고 마음이 번잡스럽고….
그러던 내가 덕수궁으로 가게 된 것은 친구의 넋두리 때문이었다.
그러던 내가 덕수궁으로 가게 된 것은 친구의 넋두리 때문이었다.
밤새우고 들어와 잠깐 졸고 있는 나를 전화로 깨운 친구는 이것도 걱정, 저것도 걱정,
걱정 보따리를 한도 끝도 없이 풀어놓더니 만나서 얘기하자며 약속 정하기를 재촉했다.
'여태 한 얘기는 뭐니?' 묻고 싶은 걸 꾹 참던 내 입에서 뚱딴지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우리 그림 보러 갈래? 이중섭인데…."
덕수궁에 들어서서부터 전시관 안에 들어올 때까지 끝도 없이 이어지던 친구의 투덜거림은 시대별로 나뉜 4개의 공간을
도는 동안 침묵으로 바뀌었다. 구상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곡기 다 끊고 밤에 술 마시고 낮에 물 마시고 은박지에
그리고 또 그리고 울다가 엽서에도 그린' 그림들은 전시관 밖의 어수선한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완벽하게 격리시켜 주었다.
커다란 수족관 속을 헤엄쳐 다니듯 이중섭의 삶과 그림 속을 눈시울을 적시다 희미하게 미소 짓다 맘껏 누리고
아쉬운 마음으로 전시관 출구를 나서려는데, 아 이런….
구상 시인의 '초토의 시 14'가 내 발목을 잡더니 그림을 보는 내내 먹먹했던 가슴에서 눈물을 짜내고야 말았다.
'자네가 간 후에도 이승은 험하기만 하이. (중략)
자네는 이제 모든 게 아무치도 않어 참 좋겠네.
어디 현몽이라도 하여 저승 소식 알려줄 수 없나.
자네랑 나랑 친하지 않었나. 왜.'
밖에는 느닷없이 비가 내리고 그 핑계로 잠시 더 머뭇거리는 동안 친구도 나도 물끄러미 내리는 빗줄기만 바라보고 있었다.
전시회에 가지 못할 수많은 이유에 꼬랑지를 내렸던 꼭 가야 하는 이유가 고개를 치켜들고 내게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오길 참 잘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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