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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시각] 착한 사마리아인

바람아님 2016. 9. 1. 23:41
조선일보 2016.09.01. 03:09

60대 남자와 50대 여자는 지난달 25일 오전 8시 35분쯤 대전 유성구 유성네거리 주변에서 개인택시를 잡았다. 함께 사업을 하는 이들은 이날 일본의 유명 유기농 빵집을 찾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택시는 인천공항행 버스 정류장을 500m쯤 남겨두고 미친 듯 달려나갔다. 기사 이모(62)씨가 가속페달을 밟은 상태에서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택시는 앞에서 운행 중이던 승용차를 들이받고 60m 정도 더 밀어내고 나서야 멈춰 섰다.


뒷좌석의 남자와 조수석에 앉았던 여자는 사고의 충격을 받은 상황에서도 자기들 짐을 챙겼다. 남자는 조수석 쪽으로 쓰러진 택시기사 이씨를 놔둔 채 차 키를 뽑아 트렁크를 열었다. 골프가방 두 개와 가방 등을 내린 남녀는 다른 택시에 옮겨 탔다. 목격자 중 한 사람이 "사고 수습을 할 때까지는 남아 있어야 하지 않느냐?"라고 물었지만 급한 듯 서둘러 빠져나갔다.


택시 기사 이씨의 숨은 아직 붙어 있었다. 하지만 목격자 10여명은 이씨가 왜 의식을 잃었는지 몰라 응급처치를 하지 못했다. 부서진 차량을 옮기려고 달려온 견인차 기사 2명이 심폐소생술을 했고, 이어 출동한 119구급대가 이씨를 500m 거리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옮겼지만 너무 늦었다.


남자 승객은 사고 4시간쯤 지난 오후 1시 20분쯤 인천공항에서 일본으로 떠나기 전 대전 둔산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자신이 '사고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씨가 숨졌다는 얘기를 경찰과 통화를 하면서 알게 된 남자는 "공항버스를 탈 시간이 촉박했고, 누군가 '신고했다'고 하기에 떠났다" "기사가 잠든 줄 알았다" 등의 해명을 했다고 한다.

남녀가 타려던 공항버스는 10~30분에 한 대꼴로 출발한다. 설령 한 대를 놓쳐 다음 차를 기다렸더라도 비행기를 타는 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이들이 급성심근경색 증세를 보였던 택시 기사 이씨를 밖으로 꺼내 구급차가 올 때까지 10여분만 심장 마사지 등을 해주면서 현장을 지켰으면 한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물론 그들도 '내가 피해자이니 자리를 떠도 잘못은 아니다'라고 여겼을 법하다. 남자 승객은 사고 당시 무릎과 치아를 다쳐 예정보다 하루 이른 지난 27일 먼저 귀국해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그는 경찰이 '사고 경위를 직접 와서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몸이 좋지 않다며 출석하지 않고 있다고 알려졌다.


현행법상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조하지 않아도 처벌받지는 않는다. '응급환자를 발견하면 즉시 응급의료기관에 신고해야 한다'는 응급의료법이 있지만 지키지 않아도 처벌 조항이 없다. '괜히 신고 잘못했다가 귀찮은 일에 휘말릴지 모른다'고 믿는 사람이 많은 게 현실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도 구조 의무와 처벌 규정을 둔 몇몇 외국법이라도 베껴야 하는 것 아닐까.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준 성경 속의 '착한 사마리아인' 같은 의인(義人)들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