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휴가 때 찾은 유럽의 한 박물관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서양화에서 사과를 들고 있는 여자는 비너스, 모피 코트에 공작새를 거느리고 있는 여자는 헤라, 나무 십자가를 들고 가죽옷을 걸친 자는 세례 요한이다. 이런 기본적인 상징들을 알 턱이 없던 나는 그저 예쁜 여자, 점잖은 노인네만이 가득 담긴 비슷비슷한 그림들을 보다 질려버리곤 했다.
“너만 그런 게 아냐.” 서양미술을 전공하고 지식 가이드로 일하는 친구가 위로했다. 그 옛날 예술과 문학에 조예가 깊다고 자부하던 고전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거란다. 조화와 균형만이 제일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다른 건 안 들어왔을 거란 얘기다. “사물에 자신의 감정을 강렬하게 투영하는 걸 아름다움이라고 알고, 또 믿었던 사람들한테나 그 유명한 고흐가 고흐지.”
휴가에서 돌아와 미술책 몇 권을 샀다. 그림의 배경을 알고 상징을 이해하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받아들이기로 하면서다. 애써 노력해 무언가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고, 그래야 비로소 통할 수 있다는 것. 시대와 배경이 다른 그림을 온전히 이해하는 건 누구한테나 어려운 일이다. 이 논리가 어디 그림에만 통할까. 삶의 궤적이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는 그림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노력이 필요할 거다.
하루 8시간만 틀면 전기료를 감당할 수 있다는 산업통상자원부의 공무원, 93평형 아파트에 7년간 거주하면서 전세금 1억9000만원을 낸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후보자, 1년 동안 생활비 5억원을 썼다는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의 얘기를 들으며 고흐를 읽지 못하는 고전주의자를 떠올렸다. 평균 재산 34억원의 20대 국회 신규 등록 의원 154명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서민을 읽지 못하는 시대와 배경에서 살아왔단 얘기다.
대통령이든 정부 관료든 국회의원이든 이번 추석 땐 재래시장 코스프레는 안 했으면 좋겠다. 박물관 그림을 보듯 아무리 얼굴을 맞대봐야 그 속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그 시간에 최근의 경제지표나 정책보고서를 깊숙이 들여다보는 것도 낫겠다. 최소한 서민을 이해까진 못해도 왜 그러는지 알기라도 해야 할 게 아닌가.
김혜미 JTBC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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