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데스크에서] 참을 수 없는 말의 가벼움

바람아님 2016. 9. 19. 00:01
조선일보 2016.09.18. 04:28

얼마 전 책장을 정리하다가 먼지가 뽀얗게 앉은 상자를 하나 발견했다. 열어 보니 오래된 기자수첩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다 쓴 수첩을 서랍에 모아두다가 공간이 모자라 커다란 상자에 넣어두곤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옛날처럼 기자수첩에 메모를 많이 하지 않는다. 한 달에 몇 권씩 수첩을 쓰곤 했는데, 지금은 1년에 몇 권 쓰는 게 전부다. 사회부 경찰기자 때처럼 '길바닥'에서 취재하는 일도 줄었지만, 취재 활동의 많은 부분이 온라인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할 때는 스마트폰의 녹음용 앱을 이용하고, 대화가 길어질 것 같으면 노트북부터 펼친다. 취재원과 통화할 때도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자판을 두드리느라 손이 바쁘다. 요컨대 취재 내용은 수첩에 적는 메모라는 물리적 형태가 아니라 스마트폰과 노트북 등에 디지털 형태로 산재(散在)하게 된 것이다.


기업에서도 대부분의 문서가 직원들의 노트북 속에 파일 형태로 존재하고, 기밀을 중시하는 삼성전자 같은 기업의 임직원들은 노트북을 회사 바깥으로 가지고 나갈 때 보안요원의 검사를 받기도 한다. 대학생들도 강의실에서 교수의 수업 내용을 대부분 노트북에 받아쳐 파일 형태로 보관한다.


디지털 파일로 만들어진 말[言]은 수첩에 적은 수기(手記)나 종이에 인쇄된 활자에 '갇혀' 있을 때보다 훨씬 쉽게 복사되고 퍼져 나간다. 종이란 물성(物性)에서 벗어나 무한 증식할 수 있게 되자, 말은 종종 신뢰할 수 없는 성질의 것으로 변질되곤 한다. 특히 스마트폰 등장 이후 밑도 끝도 없고, 사실인지 아닌지 구분도 힘든 말이 수시로 세상을 떠돈다. 이른바 '증시 찌라시'보다 더 믿을 수 없는 '카카오 찌라시'가 횡행한다. 옛날 같으면 기자들이 취재원에게 듣고 확인을 거쳐 활자화했을 말들이 손가락 몇 번 까딱거리면 퍼져 나간다. 심지어 지상파 방송마저 출처 불명 '카톡' 내용을 전한다. 한 대기업이 카카오톡상에 부정적인 글이 포착되자 여기에 다시 역(逆)정보를 붙여 재유통시키는 것을 본 적도 있다. 돈과 사람이 있으면 '조작'도 가능한 것이다. 기술 덕분에 세상을 돌아다니는 말의 속도가 빨라지고 정보의 양이 많아졌지만, 이를 과연 '진보'라 할 수 있을까.


문자가 없던 시절 구전(口傳)되던 말은 전파 속도가 더뎠다. 필사(筆寫) 문서를 돌려 보던 중세 때는 흑사병이 번지는 속도보다 뉴스가 더 느렸다. 대량 인쇄 기술이 등장하면서 속도를 얻게 되자, 신문이 풍문을 날랐던 적도 있다. '네스호 괴물'이니 '알프스 설인' 같은 괴담(怪談)들이 바로 이 황색언론 시대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신문 제작에 사진 기술이 도입되고 사실 보도의 원칙이 자리 잡으면서 설 자리를 잃었다. 그런데 발달한 디지털 기술이 또다시 무책임한 헛소문을 퍼나르고 있다. 그것도 빛의 속도로.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함부로 입을 놀려 헛소문을 퍼뜨렸다가 자신의 혀를 잘랐다. 고대의 함무라비 법전도 거짓말한 자의 혀를 자르게 했다. 디지털 시대라고 말의 가치가 이보다 가볍지는 않을 것이다.


신동흔 문화부 차장 |